[소설]오래된 정원 (16)

  • 입력 1999년 1월 18일 18시 58분


누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주 오래 있다가 얘기해 주려구 그랬는데, 그 사람 죽었어. 나는 숨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서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쉬었다. 첨에는 그냥 서랍에 넣어 두고 있다가 네가 언제 나올지두 모르구 해서, 내가 뜯어 보구 말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방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누님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잠시 후에 방문을 열고 한 손으로 편지 묶음을 내밀었다.

이래두 되는지 모르겠다. 더 있다 주려구 했는데….

방문이 닫혔다. 윤희의 동그란 낯익은 글씨가 보였다. 그네가 근무하던 중부지방 소도시의 대학교 주소가 적힌 편지 봉투는 몇 년 동안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누님의 학교로 온 편지였다. 누님의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오현우님 전교’ 라고 씌어 있었다. 편지는 모두 세 통이었다. 하나는 천구백 구십 오년 십일월, 그 다음이 구십 육년 이월, 끝으로는 구십 육년 여름이라고만 적었다.

현우씨, 이렇게 오랜 후에 당신의 이름을 써보니까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요 당신이 갈뫼를 떠난 지 어언 십 오년 째예요. 올림픽이 있었던 해에 제가 교도소로 보낸 편지 받으셨어요?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그 무렵은 제게 아주 괴로운 기간이었어요. 그 뒤 다섯 해 동안은 외국에 나가 있었구요. 당신 덕분에 그림은 아주 열심히 그렸죠. 개인전을 두 번 하고나서 때려 치웠는데 이젠 그리고 싶지 않아요. 온 세상에 탐욕스럽게 가득찬 문화적 생산물에 질려 버렸다고나 할까. 당신은 헛간의 슬레이트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위태롭고 맑게 이 세상 중간에 걸려 있는데.

이 편지는 당신의 아내도 당신의 자식도 아무 것도 아닌 저의 것이니까 아마도 당신의 감방 안에까지는 당도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쯤 내 편지라도 읽게 될까요. 그래서 오 교수님을 생각해냈어요. 학교 주소는 알고 있거든요. 당신이 언젠가는 감형을 받게 된다고 당신 후배들이 말했지만 이제 와서 어떤 변화가 온대도 별로 반갑지가 않아요. 당신이 세상에 나오시는 게 반갑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미 세계는 변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뒤늦게 과오를 발견하기 시작했죠. 과오를 저지른 또 다른 편은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하는 식이랍니다. 아, 소중한 당신. 지금 뭘 생각하고 계셔요?

나 좀 아파요. 별건 아니겠지만 오늘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을 작정이에요. 당신이 잘 인용 하시던 말 저두 한번 써먹을 게요. ‘폭풍우의 날에도 시간은 지난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요. 유리창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루요. 당신의 비좁은 창으로 수없이 많은 날의 바람과 비와 햇살이 지나가고 밤에는 별빛과 달빛이 그리고 새 소리며 먼 인가의 소리들까지 들려 오겠지요. 가끔 당신 꿈을 꾼적이 있어요. 한데 이상하죠? 당신은 언제나 갈뫼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에요. 아무리 말을 시켜두 대답이 없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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