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시인」이형기씨, 신작시집 「절벽」펴내

  • 입력 1998년 10월 28일 19시 12분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의 아픔을 겪는 수많은 연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어온 시 ‘낙화(落花)’. 시는 40여년전 태어났을 때 호흡 그대로 뜨겁게 읽히지만 시를 지은 이형기씨(65)는 이제 그 ‘분분한 낙화’를 자신의 모습으로 반추하는 노경에 이르렀다.

94년7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이제 몸 한편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시인. 산책조차 버거운 체력이지만 지난2년간 힘이 들면 누웠다가 다시 한숨 몰아쉬고 일어나 책상앞에 앉으며 토해낸 40여편의 시로 신작시집 ‘절벽’(문학세계사)을 펴냈다.

‘쫓기고 쫓겨서/더 이상은 갈 데 없는/그 숲속에/시체 하나 버려져 있다/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목발을 짚고 비틀비틀 걷다가/그 목발 내던지고 누워있는 모습/편하게 보인다/참 다행이다…’(‘한 매듭’중)

죽음과 무섭게 맞닥뜨려 봤지만 그는 애써 삶을 붙들려 하지 않는다.몸도 마음도 누군가에게든 기대고 싶을 법한데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고립으로 몰아붙인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높게/날카롭게/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냉혹함으로/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아아 절벽!’(‘절벽’)

고독은 그가 택한 시인으로서의 존재방식이다. 그 속내는 책 뒤편 ‘불꽃 속의 싸락눈’이라고 이름붙인 95수의 아포리즘(aphorism·격언)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불꽃 속…’은 시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해본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밝히는 고유한 시론(詩論).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다. 도를통한 사람,구원을얻은 사람은 그 도통함과 구원 때문에 이미 배부르니 고독과 고통이란 양식도 필요하지 않다. 시인은 득도하지 않기 위해 구도하고, 구원에 이르러 안주하지 않기 위해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존재가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라진다는 것은 슬프지 않은가. 노시인은 영혼을 토닥이듯 말했다. “우리 삶은 다섯의 기쁨과 아흔다섯의 슬픔으로 이루어졌소. 모든 의미있는 것들은 슬픔속에 있어요.슬픔을 통해서 사람이 비로소 사람다워지는거라고 나는 믿지요.”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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