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심야통신」등, 우리사회의 그늘 증언

  • 입력 1998년 6월 9일 07시 11분


입속말을 더듬거리는 듯한 어투. 모두들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고 분위기를 잡는데 혼자서 방금 꾼 꿈얘기나 하는 엉뚱함.

배수아(33)의 작품은 소설 쓰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곧잘 ‘해독불능’의 난수표로 읽혀왔다. 문장도 짜임새도 리얼리티도 ‘이런 것이 소설이다’라는 공식에 적절히 들어맞지 않는 생경함. 93년 등단 이후 네 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내는 동안 그의 소설은 ‘몽환적 분위기’ ‘회화적 기법’ ‘신세대다운 감각적 문체’ 등으로 뭉뚱그려 설명돼 왔다.

왜 그는 다른 작가들처럼 말하지 못할까. 내주 출간 예정인 작품집 ‘심야통신’(해냄)과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린 자전소설 ‘목요일의 점심식사’가 어떤 실마리가 될까.

한 여자가 있다. 한번도 준비된 인생을 살지 못했고 열등생이었으며 어려울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여자.

유년기에는 말이 서툴고 시력이 나쁘고 공동의 놀이법칙을 몰라 또래집단에서 따돌림 당했고 여학교 시절에는 ‘남자를 아는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너 어젯밤에 어디 있었어?”라고 고문당했던 아이.

그에게 인생은 ‘온갖 형태를 달리한 폭력의 연속’이며 ‘인간의 삶에는 어디에나 짐승의 덫이 있어서 날카롭게 긴장하지 않으면 살해당하기 쉬운’(‘목요일의 점심식사’중) 것이다.

배수아 소설의 한 정형.아무도 바라지 않는 아이로 태어나 근친 혹은 유부남을 사랑하고 당연한 결과로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는 불모(不毛)의 판타지는 ‘인생은 폭력의 연속’이라는 그의 세계관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아닐까.

구겨진 동화같은 그의 작품들은 가족 연인등으로 포장된 인간관계의 폭력성, 돌연변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맹목적인 적대를 밑그림으로 깔고있다. 그러나 그는 통곡하거나 싸우거나 논리적으로 폭력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당신은 알아요. 당신이 날 이렇게 조롱하며 학대해도 내가 끝내는 그것을 즐기면서 당하리라는 것을….’(‘장화속 다리에 대한 나쁜 꿈’중)이라고 읊조릴 뿐이다.

“인간 속에 깃든 피학성은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학대하는 어떤 운명을 좇아갑니다.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행복을 비껴가고야 마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그 쓸쓸한 인생들은 온전히 ‘나쁜 운명’의 소산일까. 폭력으로 병든 마음을 그려낸 배수아에게는 그 너머로 가야한다는 숙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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