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가을 ‘박봉곤 가출사건’ 이후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안성기가 14일 개봉되는 새 영화 ‘이방인’으로 돌아온다.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한 문승욱감독(31)이 자신과 호흡을 맞춰온 폴란드인 스태프들과 함께 첫 작품을 만들었다.
문감독이 이국에 머물면서 느꼈던 ‘이방인’으로서의 고독과 우수가 중년 배우 안성기에게 이입돼 고즈넉하게 살아가는 한 유랑인의 삶이 그려진다. 화면 가득 감미로운 비애와 상쾌한 쓸쓸함이 고여있으며 도입부부터 시종 안성기를 따라다니는 피아노와 피콜로, 오보에의 독주(獨奏)가 삶에 지친 관객들을 조용히 위로한다.
영화는 각각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세 사람을 담고 있지만 이들은 좀체 서로의 여로에 개입하지 않고 자기 고독을 음미하는듯 보인다. 안성기가 연기한 폴란드 바르샤바의 태권도사범 ‘김’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보다 그윽한 여백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신진감독은 그가 왜 이역을 유랑하는지, 어디가 그의 종착지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대신 오래전 헤어진 아내와 베를린에 머무는 딸의 편지가 간간이 전해지면서 김이 한때 격정적이고 들뜬 청춘을 살았으나 이제는 외로운 뉘우침에 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뉘우침은 태권도 수련생 미하우(파베우 브르지크)의 질풍노도 세월을 지켜보며 건네는 김의 충고에 담겨 있다. “내가 했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말아.” 그러나 들떠있는 미하우의 대답은 이렇다. “전 그 실수들이 좋은데요.”
그의 고적한 여로에 우연히 뛰어든 폴란드 여인 욜라(에바 가르뷔룩) 또한 어디론가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이다. 사랑과 우정의 경계선에서 김과 인연을 나누던 그녀가 떠나가고 딸의 원망어린 편지가 당도하고 낡은 하숙집마저 비워주어야 할 때부터 김의 삶은 크게 흔들린다.
중년의 김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가끔씩 풀어내 보이는 태껸의 품새들은 춤사위처럼 부드러운 힘을 품고 있다. 그 품새의 곡선 속에 스며드는 비둘기 울음과 차 끓이는 소리, 멀리 기차 달리는 소리는 가끔씩 부초(浮草)가 되고픈 인간들의 유랑본능을 오래도록 자극한다.
한국과 폴란드가 제작비의 절반씩을 부담하고 각각 아시아와 유럽 배급을 맡기로 했다.
〈권기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