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獨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와 지명관

  • 입력 1997년 11월 22일 08시 10분


그저 암울하기만 했던 80년. 조국을 떠나 유형의 세월을 견디던 나는 일본에서 한 여성과 귀한 인연을 맺었다. 유태계 독일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년 발간)을 만난 것. 그 책을 통해 「역사와 정치 그리고 세계를 보는 눈」을 틔워갈 때의 감격이란. 그 방대한 분량의 일본어판을 거침없이 읽어내려갔다.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여대 강의 교재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 「현대사상강독」 등의 강좌에서 이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그들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한줄기 눈빛에선 젊은 고뇌가 짙게 묻어났다. 이 책은 20세기 독재와 전체주의의 역사를 사회사상적 안목으로 꿰뚫어본 명저. 나치의 홀로코스트(대학살), 스탈린의 강제수용소 등과 같은 「땅 위의 지옥」을 땅 속에 파묻기 위한 저항의 정신으로 써내려 간 것이다. 독재와 전체주의의 차이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떠나온 조국의 질곡의 역사에 다시 한번 가슴 저며야 했고 다 읽고나니 역사라는 게 무언지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전에 아렌트의 다른 저서를 읽은 적이 있지만 「전체주의의 기원」을 만난 것은 미국에 있는 친구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우연이라면 우연이랄까. 이 책에서 새삼스레 역사의 장에서 무구(無垢)한 개인은 있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누가 역사의 광기와 악의 손길로부터 온전히 비켜설 수 있을 것인가. 특히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북한의 현대사가 그렇고 한국의 현대사가 그러하다. 아렌트를 통해 당시 우리사회가 독재에서 최악의 전체주의로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절박한 순간임을 알게 됐다. 폐쇄된 사회가 아니라서 전체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지금도 아렌트를 종종 인용하면서 17년전 첫 만남을 회상한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설레는 가슴으로 아렌트를 만나보라. 우리 조국의 역사가 뜨겁게 다가올지니…. 지명관(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정리〓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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