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빈머리」채우는 「비양심」…교수들 봐주기 『쉬쉬』

  • 입력 1997년 10월 28일 08시 16분


표절이란 「타인의 글귀를 가져다 자기의 것으로 발표하는 일」이라고 국어사전에 적혀 있다. 노래나 문학같은 예술계에 간혹 이런 곁눈질 창작이나 베끼기가 문제되어왔다. 그런데 대학사회조차 표절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창조를 겨냥한 양심과 상상력의 경쟁마당이어야 할 학계의 표절은 더더욱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사람은 죽는다」는 식의 빤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출처를 밝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남들이 각고의 노력끝에 내놓은 연구성과를 자기 것처럼 베끼는 것은 학문적 범죄행위다. 서구에서는 글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이디어까지 표절금지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태생적으로 외국이론의 수입에서부터 시작한 우리 학계. 외국학자의 주장을 모른척 써먹고 그들의 저서를 자기 것인양 번역, 출판하면서 표절문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최근 국내학계의 표절은 학자들간의 눈감아주기와 공범의식에 편승, 한계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교육부가 최근 2년간 지방의 4년제 국립 및 사립 19개대학에 대해 감사를 벌인 결과 8개 대학의 교수 18명이 논문을 표절하거나 같은 논문을 이중의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례로 경북대 M교수(고분자공학)는 지난해 제자가 취득한 박사학위논문을 재구성,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방대 육성 공모과제 연구결과보고서로 제출했다가 발각돼 경고처분과 함께 연구비 8백만원을 회수당했다. 강원대 K교수(미생물학)와 한국교원대 P교수(유기화학)도 제자의 석사학위논문을 짜깁기해 자신의 연구결과물로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 경고처분을 받았다. 교육부의 이번 감사는 22개 지방대와 기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다 일부 한정된 표본만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사례가 밝혀진 점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해초 서울대 중견법학자 C교수의 사례는 표절이 얼마나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 30여권의 저서와 10여권의 역서를 낸 법학계의 원로인 C교수는 올해초 「법철학」이라는 책을 내면서 동료교수들의 저서를 전재,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C교수는 문제의 책에서 같은 대학교수로 재직중인 S씨 등의 논문 30페이지 분량을 거의 베끼다시피하면서도 마치 극히 일부분만 참고한 것처럼 인용표시를 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등 문제가 확대되자 출판사측이 책을 회수하고 C교수가 1년간 휴직을 신청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휴직사유에 표절행위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고 서울대측도 『C교수의 휴직은 어떠한 징계형식도 아니다』고 밝히고 있어 사실상 처벌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C교수는 이에 앞서 94년 국내 한 일간지에 낸 기고를 통해 자신이 「법학사」라는 일본책을 「번역 첨삭하고 한국법학사를 추가」해 출간, 표절시비에 말렸음을 반성했다. 이로부터 불과 몇년도 지나지않아 C교수가 또다시 표절을 범한 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학계의 뿌리깊은 표절관행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부 감사결과에서도 드러났듯 C교수의 표절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82년경 사립명문대의 J교수가 고려대 김흥규교수의 논문을 베낀 것이 드러나 학교를 그만둔 적이 있다. 당시 J교수는 자신이 지도하던 대학원생의 논문을 차용했다고 고백했는데 제자는 남의 학교 교수논문을 베끼고 지도교수는 제자의 표절논문을 되베낀 한국 학계의 부끄러운 데를 고스란히 드러낸 치욕의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런 식의 표절은 아직도 인문사회 이공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학생들도 보고서를 쓰면서 이미 나와 있는 논문이나 책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심지어 학위논문을 전문업자로부터 구입, 제출하는 대학원생들도 있을 정도다. 이처럼 표절이 횡행하는데 대해 교수들은 하나같이 「동료의 잘못에 대한 공식적 비판이 금기시된 잘못된 학문풍토」를 꼽는다. 일례로 C교수의 주변에서는 만약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교수사회에서 적당한 타협을 통해 쉬쉬하고 넘어갔을 것이라는 게 한결같은 반응. 표절에 대응할 대학자체의 제도적 미비도 문제. 현재 서울대의 경우 교수에 대한 징계는 공무원법에 의거, 교육부에서 결정토록 돼있다. 학교측에는 교수를 징계할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다만 문제 교수에 대한 징계를 교육부에 상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자체에서 문제삼지 않을 경우 공식 징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서울대는 이번 사건으로 한차례 홍역을 치렀음에도 표절을 막기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대부분 대학은 표절과 관련된 위원회를 두고 있다. 학생들이 입학하면 우선 표절 범죄가 왜 나쁜가를 가르치고 선의의 표절을 피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만약 표절이 적발될 경우 해당 학생을 퇴학시키고 교수에 대해서는 퇴직처분을 내리거나 연구비 지원을 중단한다. 교수는 당국의 공식징계가 아니더라도 동료교수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등 학자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한편 창의성보다 형식적 완결에 치중하는 등 논문에 대한 잘못된 시각도 표절을 부추기는 또다른 문제점으로 교수들은 지적한다. 방대한 분량의 논문일수록 우수한 것인양 대접받고 내용의 충실도보다 얼마나 많은 논문을 생산하느냐를 더 평가하는 분위기속에서 표절에 대한 유혹을 쉽게 떨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한정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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