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갈아낸 커피에서 몰씬 풍겨나는 고독의 향기. 미소를 머금은 채 커피잔을 마주한 연인들. 커피향 속에서 행복했던 옛날에 잠겨든 노신사. 고독과 결실이 함께 하는 가을날 오후, 문득 한잔의 원두커피가 그리워진다.
원두커피의 그윽한 향이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다. 젊은 남녀들의 약속장소는 으레 분위기 좋은 원두커피 전문점. 신혼부부들은 집들이선물로 받은 커피메이커와 분쇄기로 커피향 가득한 신혼방을 꾸민다. 일부 직장에서도 사무실 한편에 커피메이커를 갖춰놓고 원두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J광고대행사의 김정환대리(31)는 『자판기 커피와는 「느낌」부터 다르다』고 원두커피 예찬론을 늘어놓는다.
소비량도 늘었다. 아직까지는 인스턴트가루 커피가 원두커피보다 9대1정도로 우세하지만 4∼5년 전부터 매년 5∼10%씩 꾸준히 판매량이 늘고 있다. 동서식품 부설 원두커피연구소인 멕스웰센터의 나영일소장은 『커피를 연하게 마시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어 소비량이 크게 늘지는 않지만 원두커피 인구는 이보다 훨씬 많이 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화점과 편의점의 원두커피 코너에서는 커피원두가 불티나게 팔린다. 작년 한해 전국적으로 65만대의 수입 및 국산 커피메이커(드리퍼)가 팔려 「기초 가전제품」 품목으로 꼽힐 정도가 됐다.
20, 30년대에 서울의 진고개(지금의 명동)에 자리잡고 시인과 화가들의 집합소가 됐던 커피점들은 원두커피를 내놨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인스턴트커피가 커피시장을 장악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레지가 커피를 나르고 손님과 진한 농담을 주고받던 다방문화가 풍미하기도 했다.
80년대말 대형커피전문업체 체인점의 등장과 함께 원두커피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실내장식같은 「외형」에 치중했던 커피체인점들은 커피값만 올려놓고 94년경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그 사이 주택가에까지 파고든 독립적인 커피전문점들은 이제 곳곳에서 성업중이다.
요즘은 직접 볶아 금방 갈아낸 커피를 스몰로스트(Small Roast) 커피점들이 「원두커피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서울 일대에만 30여군데. 서울 관악구 신림전철역 부근의 카페 「시실리아」 이상덕사장은 『서구적 생활방식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의 커피에 대한 입맛이 날로 까다로워지고 있다. 앞으로는 신선한 커피의 향을 제대로 살리는 업소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커피전문점을 상대로 원두커피의 맛을 자문해주는 「커피컨설턴트」 한승환씨는 『사회의 「지성도」가 높아질수록 커피애호가들의 수준도 높아진다』고 주장한다. 요즘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커피는 살짝 볶은 원두커피를 연하게 걸러내 「블랙」으로 마시는 아메리칸스타일. 강하게 볶은 커피를 진하게 추출해 크림과 설탕을 넣어 마시는 일본이나 영국의 방식도 공존하고 있다. 커피열매가 까맣게 탈 정도로 볶아내 아주 진하게 마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커피스타일을 즐기는 사람도 조금씩 늘고 있다.
한씨는 『커피향 그대로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외국에서는 거의 소비되지 않는 인공향을 첨가한 향커피가 가정용 원두커피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음식의 서구화와 미각의 고급화에 따라 정통 원두커피문화는 급속도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한다.
〈박중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