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병기/“노하우를 전수하지 말라”

  • 입력 2002년 1월 21일 18시 22분


“공무원 생활 20여년간 업무를 제대로 인계해주는 선임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경제부처의 한 고참과장은 “한국 관료사회에서는 선임자의 업무 노하우가 후임자에게 전수되지 않는 풍토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인사가 발표되면 선후임자끼리 악수나 한번하고 헤어지는 것이 고작이고 넘겨받는 것은 공식적인 서류뿐이다. 처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귀띔해주는 것이 고급정보로 여겨질 정도.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업무를 맡아온 금융감독위원회는 아예 서류를 남기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구조조정 업무가 워낙 예민하다 보니까 뒷날 문제가 될 수 있는 증거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때문에 금감위와 은행 및 기업 사이엔 “업무지시를 서류로 보내달라” “말로 하면 됐지 무슨 서류냐”는 논쟁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감사원으로부터 공적자금 관련 감사를 받은 뒤부터 경제부처의 이런 조직문화는 더욱 두드러졌다.

공무원의 이런 피해의식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수십조원어치의 자산을 해외에 매각해온 경제부처에도 이런 문화가 퍼져 있는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수조원이 걸린 자산매각을 놓고 공무원이 외국인투자자들과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타협하며 수없이 밤을 지샌 경험은 진정 소중한 자산이다. 실패담은 더욱 가치가 높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신이 겪은 협상과정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놓은 공무원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가끔 술좌석에서 단편적인 일화나 자신의 능력을 과장한 이야기가 오갈 뿐이다.

조직원의 지식을 체계화해서 공유하는 ‘지식경영’이 활발한 민간기업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한 종합상사는 협상 파트너의 성격, 좋아하는 음식, 술버릇, 취미 등을 가급적 상세히 기록하도록 할 정도.

외환위기 직후 공무원의 경험부족이나 촉박한 협상시한 때문에 많은 자산이 해외로 헐값매각된 것은 일단 접어놓자. 그러나 공무원이 국민 혈세를 써가며 배운 노하우가 사장(死藏)되는 것을 이해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병기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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