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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5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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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거론할 때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진다. 아이들을 똑같은 붕어빵으로 만드는 교육문화,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한 가족문화, 봉건영주 빰치는 오너 전횡의 재벌문화, 절충은 없고 극한 대립만 일삼는 노사문화, 개혁정권에서도 끄떡없는 먹이사슬식 부패문화, 경제위기만 닥치면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박정희식 군사독재문화, 통일 얘기만 나와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냉전문화 등 등. 반만년의 유구한 전통문화 말고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랑스럽지 못한 문화가 여전하다.
20여명의 쟁쟁한 학자들이 참여한 이 책은 “한 국가의 문화는 정치와 경제 발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매력적인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국가발전의 보편적 지향점으로 전제한 뒤에 그 발목을 잡고 있는 문화적 굴레를 입체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비서방 세계의 ‘퇴행적’ 문화 양상을 골고루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이 잘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로 낯익은 새뮤얼 헌팅턴은 서문에서 일국의 발전 양상을 문화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1960년대 초 한국의 경제 수준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엇비슷했다. 그러나 30년 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고, 가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엄청난 개발의 격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20여명의 쟁쟁한 학자 중 상당수는 90년대 말 동아시아를 강타한 외환 금융위기의 원인과 결과에 주목한다. 이들은 유교사상에 근거한 아시아적 가치가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과 성취를 중시함으로써 고속성장을 이끌어 냈지만, 서구적 산업화의 완성에 이르는 데에는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특히 한국이나 중국처럼 뿌리깊은 연고주의로 인해 법률과 제도의 정비가 미루어지고, 신뢰에 바탕을 둔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저해되는 경우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는 모든 생산요소가 자유롭게 글로벌 이동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국가경쟁력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국내의 토양에 있다면서, ‘혁신저항적’ 문화를 불식하고 생산성 패러다임을 무한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문화를 만들 것을 주문한다. 이 책이 ‘문화의 해체’를 새로운 컨설팅 상품으로 기획하려는 미국의 다국적 컨설팅업체 모니터사에 의해 편집방향이 설정된 듯한 혐의가 느껴진다.
하지만 몇몇 유력한 필진에 의해서 이 책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제프리 삭스는 아프리카의 사례를 주로 인용하면서 “문화의 중요성은 정치, 경제, 지리 등 다른 변수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보다 포괄적인 분석 틀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며 국가 발전에 대한 문화적 결정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중국계 철학교수인 투 웨이-밍은 “하나의 문화만이 근대화(modernity)와 조응하는 것은 아니며, 국가와 가정을 중시하면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창달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 발발한 동시다발 테러사태를 앞서 예견한 듯한 대목도 엿보인다. 헌팅턴이 제시한 ‘서구문명 대 비서구문명의 대결구도’는 단지 암울한 미래를 예고할 뿐이므로, 미국 스스로 줄곧 가르치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배우는 문명’으로 전환함으로써 전지구적 차원에서 문명간의 대화를 가능케 해야 한다는 주문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책에는 우리가 겸허하게 되새겨 볼만한 지적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서는 자칫 ‘혁신과 반부패〓서방의 문화’라는 잘못된 도식을 깔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시카고 대학의 인류학자 리처드 쉬웨더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이 책은 “새로운 복음주의에 의해 조직된 제1세계의 거만떨기”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없지 않다. 아랍출신의 문명비평가이자 역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서구의 ‘안하무인(眼下無人)’에 또 한번 절망했으리라.
한 국가의 발전에 끼치는 문화적 영향은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교정을 요하는 문화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가야 한다는 미명하에 한 나라의 문화 전체를 싹쓸이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문제해결이 시급하다고 호흡을 맞추지 않은 채 서구식 스탠다드를 이식하는 데 급급한 것은 현명치 못한 접근이다. 이종인 옮김, 원제 ‘Culture Matters’(2000).
이찬근(인천대 교수·국제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