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20)

  • 입력 1998년 5월 20일 19시 28분


아이들은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그중의 한 아이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 집에 살다가 나를 때리고 이사한 그 아이였다.

―웃기고 있네, 걘 깍두기야!

침묵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풍선을 터뜨리는 것처럼 와와 웃었다.

―자 다시 시작!

아이들이 흩어졌다. 나는 다시 술래가 되어 그중의 한 아이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마에서 비직비직 진땀도 배어나왔다. 아이들은 그들을 잡으려는 나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돌렸다. 나는 고양이들을 잡아보겠다고 나선 쥐꼴이었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 속 시원해 죽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얼굴만큼 새카만 그들의 눈빛이 왜 내게는 그토록 두려웠을까. 나는 그제서야 아이들이 서로 짜고 이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주인집 계집아이를 놀려먹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끼인 놀이에서 한번도 술래를 벗어날 수 없는 그 외로움, 룰을 정확히 지켜 놀이에 끼여도 아이들에게 파울의 판정을 받는 외로움, 그도 아니면 아이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버리는 동안 낙서가 가득한 벽에 두 눈을 가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우며 어둠 속에서 견뎌야 하는 외로움, 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술래인 채로 그들과 노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심심한 것은 싫었다.

봉순이 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러 왔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서 마치 어른들의 뜻이니 난 어쩔 수 없어 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빠져 버리면 나는 처음부터 부당한 이 게임의 법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그건 아이들의 표현대로 ‘반칙’인 것 같았고,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내게 한 아이가 말했다.

―썅, 그런 법이 어딨어? 술래니까 다음 술래를 만들어 놓고 가야 할 거 아냐! 어쩌나 보려고 끼워줬더니 옘병, 육시랄!

그의 말은 옳았다. 술래가 빠져 버리면 게임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다시는 나를 끼워주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보았자 케이크가 없어진 일을 어머니에게 추궁당하게 될 터였다. 나는 언니의 손길을 뿌리쳤다. 세탁소 총각과 눈이 맞아, 정신이 쏙 나가버린 듯한 언니보다 새로 생긴 아이들이 소중했다. 이제껏 봉순이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이 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었다. 나의 고집에 못이겨 언니가 돌아간 다음에도 밤이 늦도록, 시장에서 돌아오는 그네의 부모들이 늦은 저녁을 준비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영석아, 봉철아 부를 때까지 나는 술래였다. 몇 번이나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울어봤자 더 바보가 될 뿐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곯려먹고 나면 이제 그치겠지,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통과의례를 내가 잘 견디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흡족한 승인아래 술래 자리를 정정당당히 다음 아이에게 물려주고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한번쯤 무리 속에 서서 나처럼 술래가 되는 아이를 곯려주고 싶었다.

공지영 글·오명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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