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구독 55

추천

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6-01-07~2026-02-06
칼럼58%
사회일반14%
언론7%
정치일반3%
중동3%
지방뉴스3%
중남미3%
정보통신3%
대통령3%
남북한 관계3%
  • [고양이 눈]함께한다는 것

    어린이집에서 산책 나온 아이들이 노란 띠를 꼭 쥐고 걸어갑니다. 친구들과 발걸음을 맞춰야 하지만 함께라서 안전합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짝을 찾기 위한 기다림

    신발 도매상가의 한 가게에 모양과 높이가 다양한 굽이 빼곡히 쌓여 있네요. 이 굽들은 어떤 구두와 짝을 이루게 될까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궁궐 철거에 놀란 가슴…독립문도 없어진다는 소문까지[청계천 옆 사진관]

    1. 무너지는 궁궐, 남겨지는 한일제 시대 문화재의 개념이 지금 같지는 않았더라도 뭔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축물들이 철거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생생한 증언을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기와 관심에서 멀어진 궁궐이 헐려가는 것을 본 기자가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게 있어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지금은 사라진 궁궐 사진입니다.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궁궐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헐려가는 경모궁(景慕宮)”입니다. 창경궁 건너편, 조선총독부 의원 근처의 동팔호실 뒤편(지금의 서울대병원) 에서 철거가 한창이던 경모궁의 모습이었습니다. 경복궁 덕수궁 운현궁 등은 알지만 ‘경모궁’이란 이름은 여러분도 생소하실 겁니다.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경모궁(景慕宮)이 헐려 간다!창경원(昌慶苑) 건너편 총독부의원 동팔호실(東八號室. 편집자 주: 일본이 세운 정신병원) 이웃에서 안타까운 정신병자들의 아우성을 귀가 아프게 들어가던 경모궁 옛집은 무심한 모군(募軍. 편집자 주: 공사판 따위에서 삯을 받고 품을 파는 사람)들의 곡괭이 끝에 무참하게도 헐어 간다. 장엄한 궁성을 등지고 아담한 낙산(洛山)을 향하여 외롭게 서 있던 이 집은, 리조(李朝)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절륜한 힘과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큰뜻을 펴려고 하다가 낙형을 당하여 지하의 혼이 된 천추의 원한을 위하여, 그의 아들인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어놓고 춘추로 제향하던 곳이다.세월이 흐르자 시국조차 바뀌어, 춘추 두 번의 향촉은 이미 끊어진 지가 오래였거니와, 이제 말없이 헐려 가는 옛집을 위하여 울어주는 자는 창덕궁(昌德宮) 비원으로 돌아드는 ‘두루미’ 떼라 하는지?경모궁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정조가 지어 올린 제향 공간이었군요. 그 집은 궁궐의 화려함보다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조용한 공간이었고, 정조의 효심이 깃든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제향도 끊기자 행정 당국은 이 공간을 없애기로 결정합니다. ‘정신병자들의 아우성이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려오던’ 근처의 총독부 의원 건물 옆에서, ‘무심한 인부들의 곡괭이 끝에’ 경모궁은 무참히 무너져갔습니다.2. 철거 소문이 낳은 또 다른 불안, 독립문경모궁이 헐리자, 사람들의 입에서는 또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독립문도 곧 철거된단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 또 한 번 놀라는 격인가요. 하지만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16일 석간 기사 “인왕산은 의구한데 용자에 참흔 처처”를 통해 이 소문에 대해 보도를 합니다. 일종의 팩트 체크인 셈입니다. 그리곤 “독립문은 아직 헐리지 않았습니다. 철거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기사 곳곳에는 사람들의 걱정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습니다. 해태상의 이전과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궁궐까지 철거하는 것에 대한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분노도 느껴집니다.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일반 동물의 타고난 팔자요, 전변환멸(轉變換滅)이 또한 세상 만물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서,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난다고 우리가 따라 다니면서 슬퍼하고 기뻐할 까닭이야 무엇이겠습니까마는 여러 백년 궁(宮) 앞을 지키던 “해태”가 덜미를 잡히어 쫓기어 간지가 이미 오래였고 수십 년래 애국충신의 장엄한 혼백(魂魄)을 모시던 장충단(奬忠壇)이 색다른 발굽에 밟힌 지 또한 오래였으며 무심한 로동자의 곡갱이에서 서대문(西大門)과 경모궁(景慕宮)이 헐린 뒤를 이어 독립문마저 허물어 버린다는 소식은 흰 옷 입은 사람의 가슴에 얼마나 쓰라리게 울리었겠습니까.독립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습니다. 을미년의 치욕 이후, 독립을 기념하고자 서재필과 여러 지사들이 건양 원년에 뜻을 모아 세운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립문도 시간이 흐르며 쇠락해갔습니다.“처음에는 태극기를 달았으나, 삼일운동 뒤 경찰이 제거하고 소방대가 물을 뿌려 문 자체가 손상되었다.” “독립문 오른편 다리는 갈라졌고, 눈에 띄게 금이 간 곳도 있었다.”그 상징성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쇠락한 석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국은 독립문 철거는 사실무근이라 밝혔습니다. 하지만 경모궁처럼 느닷없이 철거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번져 있었습니다. 경모궁의 철거는 단지 한 건축물의 소멸이 아니라, 역사를 지워가는 손길의 서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독립문은 지금도 서울 서대문구에 서 있습니다. 3. 시인 이은상이 회상하는 경모궁의 역사사라진 궁궐 경모궁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추억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뒤로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으로 유명한 이은상 선생은 1929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월광하에서서 - 사친애”라는 글을 통해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시 꺼내 듭니다. 이은상은 단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조의 삶, 그리고 정조가 왜 경모궁을 지었는지를 통찰합니다. 이 글에서 그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라는 동요가 정조가 지었다는 설을 인용하며, 그 배경에는 피눈물 나는 조선의 비극이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세자의 누이 화완옹주와 그 남편 정치달, 그리고 영조의 후궁 문씨는 사도세자를 중상했고, 마침내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생을 마쳤다.”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단지 ‘궁중의 권력 다툼’이나 ‘정신 질환자’의 문제가 아닌, 역사 전체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슬픔으로 보았습니다.나는 오래전부터 이 역사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 비극은 사람의 피눈물 없이는 읽어내릴 수 없다. 이 얼마나 참담한 역사인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같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최소한의 상소라도 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팔짱만 낀 채 방관했다.그리하여 세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아들인 어린 정조는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후일, 영조 역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긴 했지만, 한 번 떠난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눈물만이 쓸쓸히 무릎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정조를 안고 후원에 거닐며, 세자의 넋을 향해 은근히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이리하여 1777년(정조 원년),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그 뒤에 경모궁을 지은 것도, 정조가 아버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며, 월근문(月覲門)을 세운 것도 또한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것도, 모두 아버지를 향한 그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경모궁은 정조의 애끓는 효심이자, 조선의 슬픈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마지막 기념비였던 것입니다. 경모궁의 철거를 아쉬워하며 쓴 기사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이제 말없이 헐려가는 옛집을 위하여 울어주는 자는 창덕궁 비원으로 돌아드는 두루미 떼라 하는지?정말 두루미가 떼를 지어 서울 하늘을 날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본 두루미 떼의 월동지 중에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경기도 연천과 김포였습니다. 100년 전에는 도심까지 들어왔으려나요? 그것보다는 하얗고 고고한 두루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기자는 역사의 아픔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기사처럼 실제 종로 일대에서 두루미를 볼 수 있었다면 동화 속 풍경 같았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멋진 광경입니다. 오늘 소개한 사진은 힘없던 시절, 역사적 공간이 허물어져도 막을 수 없었던 우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올 해 4월, 서울의대 교수를 인터뷰하러 갔을 때 경모궁의 흔적인 ‘함춘문’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의 일부가 살아남아, 사라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오늘 우리에게 말없이 전하고 있었습니다. 경모궁 전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참고기사동아일보 1925년 6월 21일자 〈헐려가는 景慕宮〉동아일보 1925년 9월 16일자 석간 〈仁旺山은 依舊한데 勇姿에 慘痕處處〉동아일보 1929년 9월 25일자 〈月光下에 서서 - 思親哀〉 (이은상)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1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인간과 자연의 시너지

    기와 위로 노란 꽃무리가 눈길을 끕니다. 단청의 연꽃 문양과 어우러져 어두운 기와를 환히 밝혀주네요.―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과로는 금물

    봄내 잔디와 여린 꽃에 물을 주느라 바빴는지 물조리개가 눈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과로를 방치하면 위험해요.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총독부에 폭탄 던진 김익상 뒤엔 ‘이 청년’이 있었다[청계천 옆 사진관]

    1925년 6월 9일자 동아일보에 한 남자의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당시 흔했을 사례일텐데 왜 고인의 얼굴 사진이 신문에 실렸던 것일까요? 기사를 읽어봅니다. 이 사진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삶을 내던진 한 남자와, 그로 인해 생을 견디다 못해 무너진 또 한 남자의 인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의열단의 멤버였던 형 김익상의 이름과 인생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았지만, 그 뒤편에서 형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야 했던 동생은 너무나 조용히, 비극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신문 귀퉁이에 남아 있는 동생의 이야기입니다.아래는 해당 사진과 함께 보도된 동생 김준상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사, 몇 년 전 그의 형 김익상에 대한 보도 몇 꼭지, 그리고 김준상의 죽음 후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을 다룬 기사 등을 종합하여 두 형제의 삶을 읽기 쉽도록 정리한 이야기입니다. ● 어느 불운한 시대의 그림자바람 한 점 없던 1925년 유월 초엿새, 경기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 288번지 허름한 초가 집에서 스물아홉 김준상이 삶의 끈을 스르로 내려놓았다. 오후 다섯 시,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몸은 외양간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문간을 들어서던 아내 이씨의 비명은 그 조용한 죽음을 흔들어 깨우기엔 너무 늦었다. 스무 살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게 된 그녀는 그저 망연히 남편의 주검을 바라볼 뿐이었다.준상은 본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점점 기울자 7년 전 형 익상과 함께 고향을 떠나 용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형제는 거친 막노동으로 하루를 버티었고, 비록 고되었으되 서로의 등을 기대며 견뎌냈다. 허나 그 짧은 평화도 잠시, 형 익상이 홀연히 상해로 떠나 의열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면서 준상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형이 떠난 후, 준상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용산 제탄소에서 마차를 몰아 얻은 푼돈으로 노모와 형수, 어린 조카, 그리고 젊은 아내까지 다섯 식구의 입에 풀칠해야 했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었으나, 그 힘겨움보다 더 그를 짓누른 것은 마음속 깊이 스며든 절망이었다. “간곤(艱困)하여 살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 그는 몇 번이고 그리 중얼거렸다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난 6일 집안 가족들이 동막리로 나간 동안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형의 그림자, 동생의 굴레준상의 형 김익상은 이 땅의 민초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름이었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가난 속에서 자랐으나 나라 잃은 설움에 불타 광성연초공사를 박차고 일어나 1920년 중국 펑톈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요인 암살에 나설 것을 결단했으니, 그 뜨거운 피는 조선총독부 안으로 던져진 폭탄 한 발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1921년 9월 12일, 총독부 회계과를 산산조각 낸 그 폭탄은 비록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으나, 일제에 맞선 조선 민중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염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7개월이 지난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청년이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그는 그는 바로 총독부 폭탄 투척의 범인, 김익상이었다. 도쿄로 이송돼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혹독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는 상하이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바로 그 청년”이라 대서특필하며, 한 조선 청년이 일제의 핵심 권력에 두 차례나 타격을 가하려 한 사실을 온 조선에 알렸다. 김익상의 이름은 그렇게 민족적 영웅담으로 기록되었으니, 그의 용기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허나 그 영웅담의 뒤편에는 준상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엄혹한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형의 행적이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면서, 준상의 집은 늘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익상이 총독부 폭탄 투척 직전 경성으로 잠입했을 때도 그는 동생 준상의 집을 은신처로 삼았다. 준상은 묵묵히 형의 뜻을 헤아려 그를 숨겨주었으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독립운동가의 동생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명예나 보호 대신, 끊임없는 감시와 신문, 그리고 견디기 힘든 경제적 곤궁만을 안겨주었다.● 조용히 스러져간 한 시대의 증인준상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현실이 만든 비극이자,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불쌍한 죽음을 애도하며 돈을 모아 상여를 사고 장례를 치렀다. 초라한 장례식이었으되, 그들의 정성은 준상의 마지막 길을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해주었다. 남은 유족은 노모와 형수, 아내, 그리고 어린 조카 하나뿐이었다.김익상의 투쟁이 조선 독립의 불꽃이었다면, 김준상의 죽음은 그 불꽃 뒤에 드리운 희생의 그늘이었다. 그는 싸우지 않았지만, 형의 싸움을 지켜보다 스러져갔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그의 죽음에 대한 짧은 기사는 어쩌면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리라.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무너져간 그의 삶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한 시대의 증인이었다. 준상의 죽음을 당시 동아일보는 ‘불운아’로 이름 붙였다.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담지만, 그 속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늘 마주한 백 년 전 한 장의 사진 속 청년은 단순히 불운했던 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살아내려 애썼지만 끝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존재였습니다. 사진 속 청년의 사연을 추적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그리고 그들을 저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을 잃고 남은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걱정도 됩니다. 꽤 지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 드리자면, 1990년대 말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학교 친구가 당시 국가 정보기관에 특채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식의 보답이 우리 사회의 책임있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책임을 지금도 계속 해오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한 젊은 가장의 얼굴 사진에서 역사의 이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세요. 참고기사:1922년 4월 5일: 김익상 자백은 사실1922년 5월 7일: 장기에 착한 김익상1922년 5월 20일: 총독부 폭탄범은 상해의 폭탄범 김익상1922년 5월 21일: 다섯 가지 죄목으로 공판에 부쳐1925년 6월 9일: 불운아! 김익상의 동생 자살1926년 2월 17일: 떡국을 끓여놓고…2009년 11월 14일: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경 <29> 김익상 의거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4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덤벼라 태양아!

    햇볕이 부쩍 따가워진 요즘, 파인애플을 닮은 다식물 ‘괴마옥’은 벌써 선글라스까지 장착했네요. 여름나기 준비 완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조선 최초 모스크바에 파견된 기자 이야기[청계천 옆 사진관]

    ● 모스크바 시가행진 주변을 걷는 조선의 젊은 기자192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외국인들의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 설명을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설명은 단순한 사진 캡션이 아니었습니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를 직접 취재를 했고 그리고 그 현장을 촬영한 이가 조선에서 파견된 기자라는 사실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언론이 러시아에 기자를 보낼 만한 여력이 있었을까요? 또 그 기자는 누구였을까요?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유럽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이관용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5월 행사 취재를 위해 2달 남짓 앞선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출발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도 4월 초순 경이었습니다. 요즘에야 하루 이틀이면 전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그야말로 장기간 출장을 떠나야 국제 이벤트를 취재할 수 있었던 시대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출장 출발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그의 나이 31살 때입니다.아래는 1925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관용 기자 관련 기사를 압축 정리한 내용입니다. ● ‘붉은 나라의 진실을 전하라’ — 동아일보, 1925년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기1925년 2월, 동아일보는 철학박사 이관용을 소련(당시 적로국)에 특파원으로 파견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된 소련은 ‘세계의 비밀 나라’로 불릴 만큼 폐쇄적인 곳이었다. 이미 동포들이 러시아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현지 동포들의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때, 동아일보는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전하고자 결단을 내린다.이관용은 유럽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특히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소련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다.그가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첫 보도한 내용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행사였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적십자 거리에서는 노동인민위원장이 열병을 지휘했고, 수십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이관용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펼쳐진 ‘붉은 도시’의 정치 선전 장면을 생생히 기록했다.하지만 이관용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위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소련 사회 곳곳의 불안정함을 목격했다. 시내에 만연해 하루에만 3차례 직접 목격한 소매치기,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검문검색, 공무소 출입에 필요한 복잡한 허가 절차, 반혁명 세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은 당시 소련의 내부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행자는 군경에게 언제든 신분을 제시해야 했고, 공산당 기관 방문에는 특별 허가증이 필요했다.그는 또한 신경제정책 하에서 상인 계층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도 지적했다. 노동을 하지 않고 개인 영리 사업에 종사하는 자, 즉 ‘넵만(Nepman)’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서너배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도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심각했다. 노동복을 입지 않고 부르조아 신사복을 입고 다니면 ‘넵만’이라고 업신여겨지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 특히 외교관과 기자 이외는 사치스러운 의복을 모스크바에서는 볼 수가 없다고 전했다. 구걸하는 이들에 대한 공산당원들의 냉담한 반응은, 혁명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이관용의 보도는 일상에도 닿아 있다. 그는 러시아의 국(羹) 문화가 조선의 국밥이나 찌개와 비슷하다고 소개하며, 서유럽인이 기피하는 생선 요리 ‘쏠랸카’가 조선의 생선지짐이와 유사하다고 적었다. 식당에서는 여전히 종업원이 외투를 받아주며 팁을 기대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새로운 체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구체적인 생활 풍경은 그의 관찰력의 깊이를 드러낸다.이관용은 5월 16일 모스크바를 떠나는데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로 출장을 이어간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국 허가뿐 아니라 통과 국가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의 영사관 승인과 주러 일본영사관 승인까지 총 6개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금전 소지 한도는 300엔 이하로 제한되었고, 여덟 차례에 걸친 휴대품 검사가 이어졌다.독일에서 기자는 “모스크바에서 보지 못한 중절모, 모피코트, 유행복을 입은 여성들을 보고 부르주아 세계에 온 듯했다”며, “사람들이 마치 기계처럼 살아가고, 소부르주아적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또 기자는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을 방문, 도시 곳곳에 배어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붉게 핀 칠엽수 아래로 정장을 한 시민들이 걷고,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자연스레 칸트의 사색이 떠올랐다. 이 도시는 분명 철학이 자라날 만한 토양이다”라고 표현했다. 4개월에 걸친 소련과 독일 출장을 마친 기자의 경험담을 나누기 위해 동아일보는 1925년 6월 17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적로·독일 시찰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한다. 평양 사리원 신의주 개성 대구 전주 광주 부산 원산 함흥 청진 철원 인천 등이 대상이었다. 이 강연은 마침 독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과 맞물려, 사회주의 소련과 군국주의 독일이라는 유럽 양대 체제의 변화를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 변화를 보려 했던 도전100년 전, 한국의 신문사가 소련으로 기자를 특파한 것은 단순한 외신 보도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이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했던, 전례 없는 도전이자 실천이었습니다.철저한 감시 사회 속 불안과 모순, 혁명 후유증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의 열정과 문화를 담아낸 이관용의 보도는 조선 언론이 세계 정세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구글로 추가 검색을 해 보니 1894년생인 이관용 기자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1920년 스위스에서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귀국한 후 기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 신간회 활동 중 체포돼어 2년 남짓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출옥했다가 1933년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다 횡사했습니다. 그의 굵고 짧은 인생이 아쉽습니다. 아래 사진은 AI로 강화시켜 본 이관용 기자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신문이라면 아마 현지 취재 중인 기자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겁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모스크바를 걷던 젊은 기자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7
    • 좋아요
    • 코멘트
  • 6·25 참전 용사 시구… 현역 조종사가 시타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두산 경기에서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오른쪽)이 시구하고 있다. 시타는 김 장군의 전우였던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현직 F-15K 조종사 강병준 소령.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하늘의 영웅, 전우 조종사의 손자와 프로야구 시구 시타[청계천 옆 사진관]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2025 KBO 리그 두산베어스 대 롯데자이언츠 경기에서 특별한 시구 시타가 펼쳐졌다. 1927년생 98세의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이 시구에 나섰다.1949년 학사사관 5기로 임관한 김두만 장군은 6.25 전쟁 때 총 102회 출격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100회 출격한 기록을 갖고 있다. 공군 작전사령관, 제 11대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김 장군은 을지무공훈장, 은성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6.25 전쟁 10대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대한민국 공군 창군 멤버였던 김신장군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공군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장군은 이날 시구를 마친 후 “전쟁 때 백 번 넘게 출격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러 오늘 만원 관중 앞에서 시구까지 하게 됐습니다. 강호륜 장군 손자가 저렇게 훌륭하게 커서 F-15K 조종사가 된 걸 보니 기쁘고, 안전하게 비행 잘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날 시타는 김 장군의 동료 참전 조종사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강병준 소령이 맡았는데, 현재 공군 제 11전투비행단 제 102전투비행대대에서 3편대장을 맡고 있다. 할아버지 고 강호륜 장군은 전쟁 중 평양 대폭격작전 등 총 78회 출격했다.  이날 특별한 두 사람의 시구 시타 행사 직전 공군 F-15K 편대가 경기장 위에서 기념비행을 하기도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6
    • 좋아요
    • 코멘트
  • ‘보라매 아래숲길’… 5번째 지하철역 정원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지하철 7호선 보라매역에서 시민들이 ‘보라매 아래숲길’ 앞을 지나가고 있다. 시는 ‘매력가든·동행가든 프로젝트’로 최근 보라매역 빈 공간을 활용해 실내 정원을 조성했다. 가좌역, 삼각지역, 녹사평역, 왕십리역에 이어 다섯 번째로 조성된 지하철 역사 정원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댕댕이의 취향

    애견 미용실에서 ‘댕댕이’가 꽃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뒷다리 털은 조금 남겨 두고 싶었는데, 엄마는 여름이라 짧은 게 좋다고 하셨나 봐요. ―서울 중랑구 묵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손기정 이전, 마라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었다”-한국 사회에서 마라톤 붐의 시작[청계천 옆 사진관]

    ● 평양 시민운동회와 무명의 마라토너개인적으로 마라톤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직 한 번도 직접 뛰어보진 못했고, 그 대신 수십 차례의 마라톤 대회를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2만 명의 선수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촬영하기도 하고, 주요 선수들을 가까이서 기록하기 위해 뒷걸음치며 함께 달려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매번 렌즈 너머로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마라톤 사진을 소개하려 합니다. 1925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부록 1면에 한 마라토너의 사진이 실렸습니다.신문에는 마라톤뿐만 아니라 운동회 소식도 여러 군데에 소개돼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모은 특집지면입니다. 마라토너 얼굴 옆에는 출발선에서 막 튀어나올 듯한 예닐곱 명의 선수들이 함께 포착돼 있습니다. 신문 1면에 실릴 정도면 혹시 손기정 선수일까 싶었지만, 기사를 읽어보니 아니었습니다.이미 1920년대부터 조선 곳곳에서는 마라톤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 열기는 언론과 학교, 운동회, 청년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혼자 서 있는 사진 속 인물은 그 많은 대회 중 하나였던 1925년 5월 24일 평양시민운동회에서 우승한 박량성 선수라고 합니다. 박량성 선수의 직업은 신문 배달부였습니다. 이날 운동회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됐고, 32개 단체에서 247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관람객 수는 무려 8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승 단체에는 우승기와 메달이 수여됐고, 마라톤 우승자에게는 순금 회중시계가 주어졌습니다.국가기록원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에 따르면,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마라톤 경기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한 ‘경성 일주 마라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오른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었습니다.그렇다면 손기정 선수는 언제 처음 신문에 등장했을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손기정의 첫 등장과 성장1932년 3월 21일, 경성과 영등포를 잇는 장거리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고려육상경기회 주최로 열린 제2회 ‘경영(京永) 마라톤’ 대회에서, 훗날 조선 스포츠사의 한 획을 긋게 될 이름 손기정이 신문 지면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며, “상쾌한 봄기운 속에 열린 제2회 경영 마라톤 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총 31명의 선수가 광화문 동아일보 앞 광장을 출발해 영등포를 돌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15마일(약 24km)을 달렸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프 마라톤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출발은 낮 12시였습니다. 이 보도에서 손기정은 ‘신의주 출신 청년 손기정’으로 소개됩니다. 결승점인 경성운동장에서 비교적 빠른 기록으로 들어온 그는 “경쾌한 발놀림이 인상적이며 장래가 유망한 주자”로 언급됐습니다.비록 그날 우승자는 경성 출신의 변룡환이었고, 1시간 21분 54초의 기록으로 “연습의 결실이 빛난 날”이라 극찬을 받았지만, 손기정에 대한 주목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대회를 종합적으로 조망한 기사에서는 “지방 출신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그중에서도 신의주 대표 손기정의 주법은 안정적이어서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따랐습니다.이후 손기정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여러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1933년부터는 경평 마라톤, 신춘 마라톤 등 다양한 대회에 꾸준히 출전하며 기록을 단축했고, 1935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니쇼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라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936년 6월 20일, 장도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을 거쳐 독일로 향하는 조선 출신 선수들의 모습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이 기사에서 신문은 ‘장도(長途)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며, 그들의 결연한 의지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강조했습니다.“조선인의 자긍심을 품고 국제무대로 향하는 이들이 곧 세계와 맞서 싸우며, 조선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다.”이러한 표현을 통해, 단순한 출국 보도를 넘어 당시 조선 청년들 몸에 실린 시대의 무게와 국민의 염원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마라톤은 시대의 주자였다우리가 기억하는 마라톤의 시작은 대개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 곳곳에서 ‘달리기’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하던 시민들에게는 축제였고, 어른들이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년들에게는 영감이 되었을 것입니다.비싼 장비나 시설이 필요 없었기에, 아이들은 골목에서 저마다의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중 한 소년이, 훗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소년에 대해 사회 전체가 관심과 응원 그리고 재정 지원을 했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1933년 11월 3일자 신문을 보면, 중국 안동현의 사업가들 30명이 “19세 중학생으로 비록 비공인이지만 세계 기록을 깨뜨린 손기정의 소식을 듣고 소속 양정고 교장에게 27원30전을 송금하며, 스파이크 한 켤레라도 사는 데 보태 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출발한 손기정 선수는 포함되지 않지만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본진 선수 들과 임원들을 위해 올림픽 특별열차를 편성해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를 통과해 대륙으로 편하게 갈 수 있게 했다는 보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무명의 마라토너 사진을 통해, 한국 마라톤의 출발선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뿌리 없는 꽃은 없다’는 말처럼, 손기정 옹의 올림픽 우승이라는 영광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기적이 아니라 시대의 열망과 천재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31
    • 좋아요
    • 코멘트
  • 아이와 함께… 94세 할머니도… ‘소중한 한 표’

    21대 대선 사전투표 둘째 날인 30일에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한 투표 열기가 이어졌다. 부산 남구청 대강당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자녀를 동반한 유권자가 아이와 함께 투표하는 모습. 광주 광산구 평동 드림센터 사전투표소에서 94세 어르신이 부축을 받으며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주민센터에서 투표를 마친 대학생들이 인증샷을 찍고 있다. 광주 북구 삼각동 사전투표소에서 육군 제31사단 장병들이 투표를 위해 줄을 서고 있다(위쪽부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부산=뉴스1광주=뉴스1}

    • 2025-05-3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멍하니 빠져드는 사진의 매력

    29일 개관을 앞둔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에서 한 관계자가 전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 도봉구에 들어선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공립미술관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조선 제일의 건강 어린이 찾기: 우량아 선발대회의 기원과 논란[청계천 옆 사진관]

    ● 우량아 선발대회의 뿌리1970~80년대 성장기의 기억을 가진 분들에게 ‘우량아 선발대회’는 익숙한 단어일 것입니다. 뽀얗게 살이 오른 아기들이 기저귀까지 벗겨진 채로 탁자로 올라서 있고 그 아기들을 엄마들이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심사위원으로 나선 의사들이 아기들의 건강 상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점수를 매기던 것이 ‘우량아 선발대회’였습니다.1925년 5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우량아 선발대회의 시초라고 할 만한 행사 사진이 실렸습니다. 1924년 시작된 ‘아동건강진찰’의 두 번째 해 행사라고 하는데 이날 선발된 1등 4명이 행사장 한 곳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입니다. 줄에 매어 높이 띄운 찬란한 종이 풍선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공중을 날았고, 천막을 친 식장 안에는 꽃다운 아기들과 기쁨에 찬 어머니, 할머니들로 가득하여 거의 300여 명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당시 기자는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화여자관이 주관하고 구영숙, 박선이, 유영준 등 의사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 참가한 아동은 126명 이었고 1차 심사를 통과한 32명을 다시 검사해서 가장 건강한 아이를 선발했습니다. 심사 후 동요 공연과 위생 강연, 태화코러스의 합창 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아, 일종의 지역 축제였었습니다. 1등에 선발된 4명은 사진 왼쪽부터 송신임(43개월, 여자), 김용문(17개월), 임표(5개월), 장주원(29개월)입니다. 동아일보에 비해 조선일보는 당시 이 행사를 좀 더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수상자의 이름과 함께 가정에 대한 내용도 함께 보도하고 있습니다.1등 상을 탄 아기들은 행복한 가정에 태어났다.송신임 양은 관철동 18번지 송경서(宋景瑞) 씨의 따님이요, 임표 군은 동아일보 기자인 임원근(林元根) 씨의 아들이며, 김용문 군은 조선일보 기자 김양수(金良洙) 씨의 아들이고, 장주원 군은 시내 중앙예배당 목사 장락도(張樂道) 씨의 아들이라 한다● 전국민적 관심사로 발전한 우량아 선발대회우량아를 선발하는 행사는 위 사진처럼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되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전 국민의 행사가 된 것은 1971년 남양유업이 시작한 우량아 선발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6~24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몸무게와 영양 상태를 심사하며, 분유 판촉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머리와 가슴둘레의 균형, 혈색, 근육과 골격 발달, 치아 수 등도 꼼꼼히 심사했다고 합니다. 전국적인 예선을 거쳐 MBC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선 대회는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승 아기는 1년 치 분유와 상금을 받고 청와대 초청 및 분유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선발된 우량아가 분유통 옆에 앉아 있는 광고 사진이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는 1983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모유보다 우유나 분유가 좋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전국 단위의 우량아 선발대회는 없고 간간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개최하는 건강한 모유 수유아 선발대회 정도의 행사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행사를 잘 보도하지 않습니다. ● 앨범 커버 속 아기의 눈물: 초상권 및 아동 성적 착취 논란우량아 선발대회가 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반면, 아이의 얼굴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유통된다는 것은 다른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니지만, 엄마아빠가 허락한 광고사진 속 아이가 성인이 되어 초상권 소송을 건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록 밴드 너바나(Nirvana)의 1991년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 커버에 등장한 아기 사진과 관련된 초상권 및 아동 성적 착취 논란입니다. 낚싯바늘에 매달린 1달러짜리 지폐를 향해 헤엄치는 알몸 아기의 모습을 담은 이 앨범 표지는 2023년 빌보드가 선정한 ‘역대 100대 앨범 커버’ 14위에 오르는 등 인기가 많습니다. 너바나는 당시 앨범을 발표하면서 아기 부모에게 사진 사용료로 200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앨범 커버 속 아기였던 스펜서 엘든(Spencer Elden)은 2021년 서른 살이 되었는데, 자신이 4개월 때 촬영된 이 사진이 동의 없이 사용되었으며 아동 성적 착취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너바나의 생존 멤버들과 리더였던 고(故) 커트 코베인의 유산 관리자, 사진작가 커크 웨들 등을 상대로 약 2억원 가량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이 소송은 법적 시효 문제로 여러 차례 기각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022년 1월과 9월, 1심 법원에서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엘든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앨범 커버 이미지가 2021년 30주년 기념 재발매 등으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각 재발행이 새로운 개인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엘든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급심의 기각 결정을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다만, 항소심에서는 앨범 표지가 아동 포르노의 정의를 충족하는지 여부는 쟁점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현재 이 사건은 다시 하급심에서 심리 중이며, 최종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너바나 측은 “무가치한 소송”이라며 강력하게 방어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이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이처럼 ‘우량아 선발대회’와 ‘너바나 앨범 커버 논란’은 시대에 따라 아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이 지나 예상치 못한 개인의 권리 침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종로 야외에서 열렸던 ‘건강한 아이 선발대회’의 1등 수상자 사진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열기 어려운 이 같은 행사가, 그때는 왜 가능했을까요? 여러분은 사진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좋은 댓글로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24
    • 좋아요
    • 코멘트
  • 드론으로 튜브 전달해 구조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천 하류에서 열린 ‘안전한국훈련 및 긴급구조 종합훈련’에서 소방대원들이 드론을 활용해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 튜브를 전달하고 있다. 이날 훈련에는 서초구, 서초소방서, 서초경찰서를 포함한 11개 기관에서 300여 명이 참여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거소투표 선거인 위한 투표용지 인쇄

    21일 서울 양천구 양천구선관위에서 관계자들이 21대 대통령 선거 ‘거소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있다. 거소·선상 투표는 함정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군인 등 투표소와 멀리 떨어져 직접 투표가 곤란한 유권자 8만7166명을 위한 투표 방법이다. 국내 투표용지 인쇄는 25일 시작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눈높이 교육

    딱딱하고 권위적인 급훈은 옛말. 친숙한 급훈에 오히려 더 정신줄을 붙잡게 됩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게 교육의 시작이겠죠. ―서울 한 중학교 교실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서울에도 토굴이 있었다 - 지켜본다는 건 함께 하겠다는 뜻 [청계천 옆 사진관]

    선거철이 되면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현장을 정치인들이 방문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고, 낙후된 주거지를 둘러보고, 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정치인들이 현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그런 목적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사진에 등장한다는 건 단순한 ‘보여주기’가 아니라 적어도 그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로 읽혀야 합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는 ‘챙기겠다’, ‘함께하겠다’,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요즘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토굴이나 움막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높게 솟은 빌딩과 바쁘게 오가는 인파 사이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만든 주거 형태는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불과 백 년 전 서울 종로 서대문 동대문 일대에는 실제로 토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토굴(土窟)’이란 말 그대로 땅을 파 만든 움막을 뜻합니다. 집도 방도 아닌 그저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임시거처였습니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종로경찰서 관내 토굴 빈민 15가구에 대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봄은 가고 여름은 오는데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날그날의 먹이를 구하다가 저녁이 되면 저물어 가는 해의 그늘을 따라 침침하고 후덥은 토굴(土窟) 거적자리로 기어 들어가는 토굴 생활자가 얼마나 되는가. 서대문과 동대문 두 곳 관내에 대해서는 이미 보도한 바 있으므로 이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다음으로 종로경찰서 관내의 통계를 들어보면 총 호수가15호에 인구가 51명인데, 그 중 40명이 남자이고 11명이 여자이라는데 본정서 관내의 9호 47명과 함께 시내 경찰서 중 가장 적은 수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흩어져 사는 곳을 보면 경운동(慶雲洞) 96번지에 1호 3명이 살고, 원동(苑洞) 241, 27번지 등 관유지 안에 3호 10명이며, 광화문통(光化門通) 1번지 총독부 산림 속에 역시 3호 10명이요, 루하동(樓下洞) 242번지 리완용후(李完用侯) 소유 토지 안에 3호 4명, 서대문 밖 행촌동(杏村洞)으로 넘어가는 성지, 즉 사직동(社稷洞) 보안림(保安林)안에 4호 17명이며 도렴동(都染洞) 105번지 양정고등보통학교 옛터에 1호 일곱 명이 살고 있다는데,그중 여자와 함께 사는 곳은 경운동과 루하동 사직동 세곳으로 경운동이 한명 루하동이 두명 사직동 여섯명이라하며 움집살이는 움집살이나 어쨌든 순전히 토굴은 아닌 반토굴 반가옥의 움집 생활자가 38호로 전기 15호를 합하면 전부 53호인데 그들의 직업을 들어보면,▲ 날품팔이 24▲ 모군 4▲ 지게군 5▲ 車夫 6▲ 職工 5▲ 雇傭人 7▲ 行商賣藥等 6▲ 飮食店 떡장사 3▲ 도배군 1▲ 配達夫 1▲ 상두군 1▲ 洗濯業 1▲ 其外 거지若 약간인데 그 중 제일 수입이 많기는 도배군으로 그는 하루에 일원 50전까지도 벌 때가 있다하며 그와 반대로 지게군 날품팔이 등이 제일 수입이 적은데 운수가 틔여야 50~60전 돈을 벌게 되는 외에는 대개는 30전 내외인데 그나마 날이 궂은 날 같은 때에는 한 푼 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종로경찰서 관내의 토굴빈민 15호 - 가장 많기는 사직골 부근, 직업은 날품팔이가 제일”토굴과 움막의 삶을 담은 사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1924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움막 사진이 실린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 을지로 부근입니다. 그리고 1960년 12월 31일자 기사에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서울 용산역 인근 토굴을 방문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말 민정 시찰 중에 대통령이 토굴을 직접 찾았다는 것은 단순한 퍼포먼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직접 보고 듣고 해결책을 찾겠다는 메시지로 읽힙니다.이처럼 토굴과 움막은 1920년대부터 최소 40년간 사회적·정치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주거 형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최근 다시 선거철이 찾아오며, 각 정당의 후보들이 서민의 삶의 현장을 찾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호 1번, 2번, 4번 후보들 모두가 거리와 시장, 쪽방촌을 찾아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그들이 5년 임기 동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이 진심이고 그 관심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선거철마다 넘쳐나는 고해상도의 후보들 사진을 보면서 문득 그런 기대가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5-17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