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發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
한국도 ‘흰개미’ 피해 등 증가… 범정부적 의제로 민관 협력해야
이라크 지구라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기원전 4000년경, 달의 신 ‘난나’를 위해 건설된 이라크 우르의 지구라트(Ziggurat).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 거대한 계단식 신전은 고대 수메르 문명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종교 체계를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런데 최근 수년 동안 신전의 북쪽 얼굴이 급격히 훼손된 것으로 조사됐다. 주범은 기후 위기였다.
지난달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구라트는 기후변화로 손상돼 “보수가 시급한 수준”에 이르렀다. 기단 최상부인 3층은 이미 풍화와 침식을 겪었고, 최근엔 2층도 깎여 나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혹독하고 건조한 날씨가 토양의 염분 농도를 높여 소금 퇴적물을 형성했다”며 “이는 성경 속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알려진 우르와 한때 제국의 찬란한 수도였던 바빌론 등 고대 유적을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라트 인근의 우르 왕릉도 기후 위기로 인한 위험에 처했다. ‘이라크판 왕가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우르 왕릉은 기원전 2600년경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린 왕과 왕비들이 묻힌 공동 무덤군. 하지만 지구라트와 마찬가지로 최근 소금 퇴적물이 급증하면서, 묘지를 이루는 흙벽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 중국부터 이집트까지 글로벌 위협
수천 년 역사를 품은 세계 문화유산에 ‘기후 위기 경고등’이 켜졌다. 지난달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선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중국 남부 지역에는 집중호우가 발생하는 등 기후변화가 가속화하자 문화유산도 심각한 위험에 빠지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특히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피해 사례가 많다. 이탈리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인 베네치아는 “도시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켜졌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베네치아 당국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 4월까지 홍수 방어 시스템(MOSE)이 154차례나 가동됐다. MOSE는 홍수가 예상될 경우 수문을 세워 베네치아 석호(潟湖·바다와 분리돼 생긴 호수)의 수위를 조절하는 체계. 물의 흐름을 막다 보니 수질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석호를 관리하는 안드레아 리날도 과학위원회 위원장은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해수면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MOSE 가동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며 “세기말까지 수위가 1m가량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수문을 연평균 200번 여닫아야 하는 수준이다. 석호도, 도시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례적인 수준의 폭염과 폭우가 잦아진 환경도 위험 요소다. 손꼽히는 세계유산 보유국인 중국은 극단적인 기후가 반복되면서 사찰이나 궁궐 건축이 갈라지거나 침식되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4월 네이처 포트폴리오 계열 학술지인 ‘헤리티지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 ‘중국 세계유산의 기후위험 평가, 긴급한 적응 대책 필요성 부각’에 따르면 중국 유네스코 세계유산 39곳 중 82%가 가까운 미래(2031∼2060)에 기후변화 영향권에 놓일 것으로 관측됐다. 세기말(2071∼2100년)엔 39곳 모두 ‘중간∼극한 위험’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국 북부 산시성의 우타이산(五台山)과 윈강(雲崗)석굴이 있다. 우타이산은 당나라 목조건축의 정수를 보여 주는 ‘불광사 동대전(佛光寺 東大殿)’ 등 41개의 사찰이 있는 불교 순례지. 윈강석굴은 석굴 254개과 석조 불상 5만9000여 점이 모여 있어 5∼6세기 불교 예술의 뛰어난 사례로 평가된다. 현지 연구진은 “불광사는 겨울철 급격한 기온 변화로 기와가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며 손상됐고, 여기에 폭우가 덮치면서 누수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물 아래서 보존돼 온 문화유산도 예외가 아니다. 지중해에 잠긴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궁전, 충남 태안 앞바다의 고려시대 난파선 등도 해수온 상승과 산성화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올 1월 국제 학술지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발표된 논문 ‘기후변화와 해양 산성화가 수중 문화유산에 가하는 위협’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금 같은 속도로 세기말까지 증가한다면 “산성화된 물속 석조 문화유산에 대한 비가역적인 손실 또는 변형이 지금보다 최대 4배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탈리아 파도바대 연구진은 “해양 생물은 수중 문화유산의 표면을 덮어 일정 부분 보호막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보호막이 사라지면 침식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될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 목조 유산 많은 한국도 예외 아냐
지난해 3월 화마로 훼손된 경북 의성군 천년사찰 ‘고운사’ 범종(왼쪽 사진)과 전각. 의성=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우리나라에서도 기후변화로 인한 문화유산 피해가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3월 ‘괴물 산불’은 신라시대 사찰인 ‘천년 고찰’ 고운사를 삼켰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반구천의 암각화는 여름철 집중호우 때마다 침수를 반복하고 있다.
특히 전체 문화유산 가운데 온·습도에 취약한 목조건축물 비중이 높아 주의가 요구된다. 지난해 6월 열린 ‘야외 문화유산의 기후변화 대응 보존기술’ 학술세미나에서 김윤상 전북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온·습도가 상승하면 목재와 벽화, 단청, 흙 등의 내구성에 영향을 미쳐 부재 손상은 물론 구조적 위험도 초래할 수 있다”며 “목조건축물 특성상 피해가 단기간이 아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찰이 중요하다”고 발표했다.
덥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흰개미’가 목조 문화유산을 갉아먹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22년 연구보고서 ‘국가지정 목조건축문화재의 흰개미 피해 현황 분석’에 따르면 전국 국가지정 목조 건축유산 362건 가운데 육안 조사를 통해 흰개미 피해가 확인된 사례는 51%에 이른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김시현 복원기술연구실 학예연구사는 “피해 사례는 2022년 이후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며 “겨울철 최저 기온이 오르면 흰개미의 활동기간 및 범위도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토착화하지 않은 외래종 ‘대만지중흰개미’도 세계로 영역을 넓히고 있어 우려 요소”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에서도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정전(正殿)의 일부 목재에서 흰개미 피해가 확인됐다. 2010년대 초반까지 흰개미 청정지역으로 꼽혔던 제주도마저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복원기술연구실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향교(鄕校) 등 목조 건축유산에서 흰개미 피해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해가 갈수록 강도와 빈도가 심해지고 있는 여름철 집중호우도 대응이 시급하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2008∼2023년 재난으로 훼손된 국가유산 가운데 85%가량이 집중호우나 태풍, 폭설 등 풍수해 때문으로 나타났다. 피해 정도를 경미한 수리를 요하는 1등급에서 구조 붕괴 같은 5등급까지 나눠 보면, 주요 구조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4등급 피해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문화유산연구원의 김세현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는 “산지, 하천 등 야외에 있는 문화유산은 집중호우 때 지반이 포화하거나 배수가 원활치 않은 문제가 있다”며 “이 경우 피해가 표면 손상에 그치지 않고 침하나 붕괴, 변형 등 구조적 손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흐름은 옛날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이 오늘날 극한 기후를 견디기엔 역부족인 것과도 관련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기후위기와 문화유산 국제심포지엄’에서 마리오 산타나 킨테로 칼턴대 도시환경공학과 교수는 “역사적 구조물은 과거 기후 조건에 적합한 재료와 기술로 지어진 경우가 많아, 최근의 홍수나 폭염처럼 극단적인 기상 현상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예컨대 석조 건축물과 목조 구조물은 보강 없이 장기간의 습기나 강풍, 온도 변화에 노출될 경우 급속한 열화(劣化)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 장기적·포괄적 대응 체계 必
기후 위기가 초래하는 피해는 물리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홈페이지에서 “기후변화는 우선 물리적 피해로 드러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도 영향을 준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일하고, 예배하고, 교류하는 ‘살아 있는 유산(dynamic heritage)’에서 그 부작용이 특히 지대하다. 해수면 상승이나 사막화로 주민이 떠나가면 유산이 방치되기 쉽고, 전통 의례와 문화적 기억 역시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기후변화를 장기적 리스크로 관리하는 체계가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세현 연구사는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서서히 누적돼 일반적인 노후나 풍화와 구분하기 까다롭고, 문화유산마다 입지 및 재료, 보존 상태가 달라 원인을 명확히 분리해 검증하기 어렵다”며 “장기적 관측과 실험에 기반한 조사연구가 폭넓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정부도 관련 위기 대응에 나서고 있긴 하다.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2023∼2027)’을 세워 운영 중이다. 해당 계획엔 기후변화 모니터링 체계 고도화와 관련 데이터 축적 및 분석, 위험 수준 평가·관리체계 구축, 재난 대응 체계 강화 등이 포함돼 있다. 올 2월엔 공모를 거쳐 ‘기후변화에 따른 해충 피해 예측·대응을 위한 생태 매핑 및 확산 예측 시스템’, ‘침수 기록 기반 건축문화유산 하부 배수 최적화 기술’ 등의 개발에도 나섰다.
다만 이런 문화유산 보호 대책은 더 포괄적인 정책 차원에서 실시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킨테로 교수는 “전반적인 기후 담론이 종종 과학, 기술적인 문제로만 취급되며 역사문화적 관점을 배제하거나 따로 두고 보는 경우가 흔하다”며 “이는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사회 정체성과 결속력, 집단적 기억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짚었다. 기후 위기 시대, 문화유산 보호를 범정부적인 의제로 삼아 여러 분야의 기관과 연구진이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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