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성우 이현과 픽셀코리아 김민수 디렉터.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미 완성된 옷이 있는데, 그 옷은 내 몸에 맞춘 게 아니에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 옷을 입고 런웨이에 서야 합니다.”
10일 서울 마포구 픽셀로직 코리아에서 만난 이현 성우는 더빙 작업을 패션쇼 무대에 빗댔다. 원작이라는 틀 안에서 성우 자신의 목소리로 캐릭터를 소화해 한국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더빙이라는 얘기다.
텍스트 음성 변환(TTS) 기술의 발전 등으로 설 자리가 좁아졌던 성우 더빙이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전략변화와 맞물려 호황을 맞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등이 글로벌 콘텐츠의 한국어 더빙을 대폭 늘리고 있는 것.
‘원피스’, ‘원펀맨’ 등의 더빙에 참여한 이현 성우는“작년엔 일주일에 녹음 한 건이 아쉬웠다면, 올해는 하루에 한 건은 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더빙 영상의 원 언어도 다양해졌다고 한다. 픽셀로직 코리아의 김민수 디렉터는 “작업 범위도 넓어졌다”며 “영미권 콘텐츠 중심이던 더빙 작업이 일본, 독일, 인도 등 다양한 국가의 콘텐츠로 확장됐다”고 했다.
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성우 이현과 픽셀코리아 김민수 디렉터.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김 디렉터는 “넷플릭스가 더빙을 더 이상 부가 작업이 아닌 콘텐츠 완성도를 좌지우지하는 요소로 인식한다”고 했다. 또한 5.1 서라운드 사운드·돌비 애트모스 등의 사운드 기술 도입을 통해 한국 더빙 업계의 오디오 제작 환경과 역량이 향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가 한국어 더빙을 확대하는 배경에는 다양해진 시청층이 있다. 넷플릭스 관계자에 따르면 자막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 눈의 피로를 호소하는 고령층, 운동이나 요리·출퇴근 중 오디오만 켜놓고 소비하는 멀티태스킹 이용자, 시각장애인까지 더빙 수요층은 넓다. 해외 한인 가정에서 자녀 한국어 교육용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었다. 이현 성우도 “쇼츠 시대가 되면서 영상을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꽂히는 순간이 생기면 그때 다시 몰입하는 방식이 일반화됐다”며 “귀로 먼저 들을 수 있는 더빙이 유리한 환경”이라고 진단했다.
인공지능(AI) 더빙 기술의 부상은 업계의 새로운 과제다. 김민수 디렉터는 “대사 사이의 침묵에 담긴 호흡,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나오는 해석은 아직 AI가 대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현 성우는 “AI는 척질 수 없고 같이 가야 되는 부분”이라면서도 우려를 드러냈다. AI 음성이 자칫 10대에게 표준어처럼 정착될 수 있다는 것.
그가 제시한 해법은 결국 더 섬세한 연기다. 그는 “우리말의 고저장단을 보면 숫자 ‘1’과 ‘일하다’의 ‘일’은 발음이 다르다”며 “이런 섬세함을 불편하지 않게 구현해내는 것이 AI와 동등하게 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했다. “음성 연기의 본질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좋은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게 그의 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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