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현석]AI 슬롭의 시대, 검증에 투자하라

  • 동아일보

임현석 디지털랩 전략영상팀장
임현석 디지털랩 전략영상팀장
2025년 화제가 된 현상을 꼽는다면 단연 ‘슬롭(slop)’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미국 사전 메리엄-웹스터, 호주 매쿼리 사전이 모두 올해의 단어로 꼽았다. 원래는 오물이나 음식물 찌꺼기를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질 낮은 디지털 콘텐츠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초 재집권한 뒤 오락가락 정책 수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는 뜻의 ‘타코(TACO·트럼프는 늘 도망친다는 뜻)’나 화폐가치 하락에 금이나 비트코인 등 대체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인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 등 강력한 경쟁자를 제친 결과다.

저품질 콘텐츠로 조회 수만 올려 돈을 버는 행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트럼프가 왕관을 쓰고 춤추는, AI로 조작된 ‘무맥락 영상’도 더는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올해 유독 슬롭이 주목받은 건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도권이 AI로 넘어가는 티핑 포인트(변곡점)로 읽혔기 때문이다.

미국 콘텐츠 마케팅 기업 그라파이트가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5월을 기점으로 새로 게시된 영어권 웹 문서의 52%가 AI에 의해 작성됐다. 챗GPT가 출시된 2022년 말엔 10%였다. AI가 생성한 글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기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콘텐츠 분석 플랫폼 캡윙이 이달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유튜브 신규 계정 추천 영상의 21%가 AI 생성물이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미지의 약 70%가 AI 도구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슬롭이라는 단어엔 AI가 지나치게 흔해진 데다가 특별한 노력을 들인 구석도 보이지 않아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는 야유와 조롱이 담겨 있다. AI가 범람하는 단계에 이르자 사람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직장에선 AI로 대충 짜깁기한 무성의한 보고를 뜻하는 ‘워크슬롭(workslop)’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학부생이 AI를 이용해 1년 만에 113편의 학술 논문을 찍어내 세계적인 학회에 투고한 사실이 알려지며 파장이 일었다. ‘리서치 슬롭(research slop)’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이렇다 보니 디지털 세계에선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성과 진실성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흔해진 기술보다 고뇌와 의심에서 비롯한 신뢰 가치가 재조명되는 것이다.

이건 진짜인가? AI 시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콘텐츠 소비자들은 저마다 노하우를 만들어냈다. 일그러진 배경 글자, 광원과 맞지 않는 그림자 등 AI가 흔히 범하는 오류를 육안으로 검증하는 팁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되고 있다. 여러 언론사의 기사와 학술자료를 열어놓고 정보의 출처와 배경을 교차 검증하는 이른바 ‘수평적 읽기’도 팩트 감별법으로 불린다.

그럼 가짜를 걸러내는 ‘디지털 문해력’의 책임을 개인들에게만 지울 것인가. 콘텐츠 제작자는 AI 사용 여부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플랫폼은 AI 콘텐츠를 검수하고 슬롭을 걸러내는 필터링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정부는 제도적 인프라 구축에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생산의 효율만큼 검증에 투자해야 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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