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유죄 판결률 28% 지검장의 대통령 기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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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기소한 앨빈 브래그 뉴욕 맨해튼 지방검사장이 4일(현지 시간) 기소 인부 절차의 심리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왜 전직 대통령을 기소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기소한 앨빈 브래그 뉴욕 맨해튼 지방검사장이 4일(현지 시간) 기소 인부 절차의 심리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왜 전직 대통령을 기소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지난해 1월 미국 최대 도시 뉴욕의 5개 자치구 중 가장 부유한 맨해튼의 지방검찰 수장으로 하버드대 출신의 흑인 검사 앨빈 브래그가 취임했다. 검사 500명, 연 예산 1억6900만 달러(약 2197억 원)의 공룡 조직을 이끌게 된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중교통 무임 승차, 체포 저항, 대마 소지, 성매매 같은 범죄는 또 다른 강력 범죄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피의자의 재판 전 구금을 피하고, 이들의 형량 단축에 집중하고, 법정에서 성인으로 간주되는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의 수를 줄이겠다고도 했다.

최근 ‘뉴욕선’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취임 후 총 1119건의 강력 범죄를 기소하지 않았다. 살인, 강간, 강도 등 응당 강력 범죄로 다룰 사안을 경범죄로 낮춰준 비율 또한 52%에 달했다. 그의 전임자 시절 이 수치는 40%를 넘긴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런 행보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고 주장한다. 범죄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수 인종은 인종 불평등이 만연한 미국의 사회 체계 탓에 실제 죄보다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재기 기회 또한 적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맨해튼 빈민가 할렘에서 자란 그는 미성년자 시절 경찰의 이유 없는 탄압을 수차례 겪었고 무고한 지인이 경찰의 총에 숨지는 사건도 목격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인종 차별이 기득권 백인 개개인의 편협함 때문이 아니라 비백인에게 불공정한 사회 제도에 기인한다는 ‘비판적 인종 이론(CRT·Critical Race Theory)’, 소수 인종에게 가혹한 사법 체계가 인종 차별을 강화했다는 ‘비판적 법률 연구(CLS·Critical Legal Studies)’에 빠졌다. 재임 내내 인종 차별 정책 및 발언으로 비판받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은 그가 CRT와 CLS에 더 천착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성향에 민주당원인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한 것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을 뿐 아니라 법적 근거 또한 빈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뉴욕 토박이 기업가 출신의 전직 대통령이 집권 전 회사 장부의 허위 기재를 통해 혼외정사 무마용 돈을 준 것은 그가 공소장에 적시한 대로 문서 조작이다. 그러나 이 지급과 2016년 대선에서의 트럼프 승리 사이에 어떤 명확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자금을 쓰지 않았다. 당시 대선에서 그의 승리 일등공신이었던 백인 노동자층 또한 불륜 스캔들이 알려졌다 해도 트럼프를 찍었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다. 애초에 ‘도덕’ ‘윤리’ 등을 기대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가 몇이나 될까. 주법인 문서 조작과 연방법인 선거법 위반을 모호하게 결합시킨 그의 주장의 법적 타당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공소가 기각된다면? 설익은 논리로 초유의 대통령 기소를 단행했다 망신만 당한 지검장으로 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그가 취임한 후 맨해튼 지검이 기소한 범죄가 유죄 판결을 받은 비율이 뚝 떨어졌다.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2019년 53%였던 경범죄 유죄 판결률은 지난해 말 28%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강력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률 또한 68%에서 51%로 하락했다. 기소를 안 하거나 중범죄를 경범죄로 낮춰주는 건 검사의 ‘재량’이라 치자. 기소한 범죄가 유죄 판결을 받지 못한 건 ‘실력 부족’이다.

무엇보다 그는 기소가 결정된 지난달 30일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할 판을 깔아줬다. 일각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이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수 유권자를 상대로 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 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본선에서도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원치 않아도 역사는 그를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복귀시킨 일등공신’으로 기록할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유죄 판결률 28%#앨빈 브래그#회복적 정의#대통령 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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