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타도야말로 백두의 혁명정신[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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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수십 도의 강추위 속에 백두산에 오르는 북한 주민들. 북한은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매년 수십만 명씩 강제로 백두산에 보내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영하 수십 도의 강추위 속에 백두산에 오르는 북한 주민들. 북한은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매년 수십만 명씩 강제로 백두산에 보내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이달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군인들은 주석단에 오른 김주애를 향해 ‘백두혈통 결사보위’라는 구호를 열심히 외쳤다. 열병식에서 백두혈통을 결사보위하겠다는 구호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습 체제의 노예로 전락한 청년들이 10세 어린애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씁쓸한 장면을 보면서 북한 땅을 인질처럼 타고 앉아 4대째 향락을 누리고 있는 지긋지긋한 ‘백두혈통’에 저주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만민 평등의 사회주의를 만든다는 사기에 속아 반세기 넘게 살았더니 혈통을 결사보위하라는 노골적인 협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백두혈통이란 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운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연변에 김일성의 부대였던 항일연군 2군 6사 출신의 여영준이라는 사람이 1990년대 초반까지 살았다. 광복 후 북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연변에 남았던 항일연군 출신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도 남겼는데,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번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김 정위(정치위원의 줄임말),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중국 연변 백두산 인근의 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쯤이야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의 주변에 모여 앉아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의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의 위수사령관을 하마’ 하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김일성도 북조선에 돌아가 이렇게 한 나라를 세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 후 안도현장이 되는 게 꿈이었던 김일성은 상관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하는 바람에, 또 싸우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맨 먼저 소련으로 도망간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아 북한을 타고 앉았다. 광복 후 78년 동안 북한은 왕이 된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 그들의 자손들을 위한 나라였다.

운 없이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출신성분이라는 55개의 씨실과 사회성분이라는 4개의 날실로 구성된 계급 사회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살아야 했다. ‘혁명가 가족’으로 태어나면 바보라도 간부가 됐지만 ‘지주, 자본가, 종파, 종교인’ 등의 출신성분으로 태어나면 아무리 똑똑해도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농민이라는 사회성분이면 평생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두혈통 결사보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이 성분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결정되는 이런 사회를 대대손손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지키라는 것이 어디 백두혈통뿐인가. 김정은은 집권 이후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겨울마다 사람들을 백두산에 내몰았다. 백두의 혁명정신을 내세워 수혜 본 자들은 뜨뜻한 곳에 앉아 채찍질을 하고, 노예가 된 자들이 칼바람 속에서 백두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영하 40도의 기록적 한파가 찾아온 지난달에도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며칠 동안 백두산에 오르다가 동상을 입었다.

어린애를 새 주인으로 내세운 지금 북한 사람들은 백두 혁명정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백두의 혁명정신은 노예의 정신이 아니다. 그 본질은 ‘혈통 뒤집기’ 정신이다.

백두혈통이란 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묘지기 혈통이 나온다. 묘지기의 증손자 김일성과, 비슷한 처지의 까막눈 소작농들은 총을 잡고 타고난 팔자를 바꾸었다. 그들은 권력을 잡은 뒤 자신들이 섬기던 부자들을 죽이고, 그 자손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부자가 돼서 80년 가까이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백두산에서 그런 정신을 배워 가야 한다. 콘크리트처럼 굳은 신분 세습, 계급 사회를 목숨 걸고 뒤집어 버리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백두혈통에게 반항하면 일족을 멸족시키는 연좌제 속에서 무장투쟁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탈북하는 것도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목숨 걸고 남쪽에 온 보상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노예의 굴레를 벗고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다. 혈통이란 것을 섬기지 않고, 내가 주인이 돼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백두혈통#세습 타도#혁명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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