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문턱에서 불안과 서글픔 마주하게 돼
영화 ‘파과’ 속 ‘여전히 현역’ 이혜영을 보며
더 성장하고 더 좋은 어른 가능하지 않을까
젊은 날엔 못하던 나이에 맞는 역할을 위해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이렇게 또 고단했던 한 해를 보낸다. 환갑이 되는 해여서 그랬는지 올해는 유독 고단한 일이 많았다. 예순 번째 생일을 맞던 날에는 그간의 피곤이 풀리고 건강도 좋아 가족으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도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보내지 못했다. 내 아버지는 여든을 조금 넘기고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내게도 아버지처럼 그 병이 찾아올지 모른다. 이제 환갑이니 여든까지 겨우 20년이 남았다는 생각에 씁쓸하고 서글펐다.
얼마 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청룡영화제 영상을 보게 됐는데, 여우주연상 후보가 호명될 때 이혜영 배우의 이름이 있었다. 영화제가 끝난 뒤의 영상이었고 올해 그 상을 누가 받았는지도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순간 이혜영이 그 상을 받기를 바랐다. 그가 주연한 영화 ‘파과’를 너무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클릭한 영화였는데, 재미도 재미지만 주연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이혜영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저 사람은 여전히 현역이구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는 일에 조금씩 자신감을 잃었다. 지금 대학에 처음 부임했을 때, 과분할 정도로 잘해 주는 선배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은근히 나를 깎아내리곤 하는 선배 교수도 만났다. 그때는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당시 그 선배의 나이가 되고 보니 자신감을 잃어가던 그는 젊고 자신만만한 나를 질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날의 나는 내 일을 즐겼고 매사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퇴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조금 설렁설렁 일하며 은퇴를 준비해야겠구나’ 싶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게 남은 날을 세기 시작한 것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날이 내게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런데 이혜영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주연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파과’에서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등장했지만, 매 장면에서 화면을 압도했다. 젊은 배우들과의 앙상블도 상당했다. 배우라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배우는 나이가 들며 연기가 더 깊어지는지도.
그런데 이혜영을 부러워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논문을 쓰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에너지 넘치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버거워진다 해도, 올해의 나보다 새해의 내가 더 성장해 있는 일은 정말 있을 수 없는 걸까?
그러자 내게 과분했던 선배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다만 감사한 마음뿐이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후배 교수를 질투하고 깎아내리기보다는 격려하고 부족함을 덮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총기는 쇠퇴하지만 인격은 더 깊어지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 아니었을까?
나도 내가 있는 공동체에서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속도는 느려지고 내는 성과는 작아진다 해도, 그런데도 성실하게 연구에 임하는 선배.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는 선배. 내가 감사했던 그들처럼 나도 젊은 나이의 나에게는 요구되지 않던 일, 젊은 나이의 나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파과’에서 배우 이혜영은 예전만 못 한 실력으로 퇴출을 압박받는 60대 킬러를 연기했다. 젊은 날의 이혜영은 할 수 없는, 60대의 이혜영이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런 역할이 내게도 있을 것 같다.
노년과 죽음을 준비하는 건 현명한 일이지만, 남은 날을 세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성장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즐기고,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기뻐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젊은 날의 이혜영이라면 맡을 수 없었을 역할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 준 이혜영에게 찬사를 보낸다. 고단한 한 해를 보내고 또다시 고단할 한 해를 맞이하지만, 배우 이혜영처럼 나이에 맞는 새로운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새해에도 성실히 해내려 노력할 모든 이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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