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주인은 전세금을 내리지 않으면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고, 세입자들은 전세 매물을 골라잡을 수 있는 ‘역전세난’ 속에 나타난 풍경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금은 8.3% 하락했다. 지난달도 매주 1% 안팎으로 가격이 빠졌다.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세거래 5건 중 1건이 2년 전 계약 때보다 낮은 가격에 이뤄질 정도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고 올해 상반기에는 신축 아파트 입주도 늘 것으로 보여 당분간 역전세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불과 2년여 전엔 상황이 정반대였다. 당시 면접관 자리에 앉은 건 집주인이었다. 전세 물건의 씨가 마르고 전세금이 치솟는 ‘전세난’ 때문이었다. 집주인이 세입자의 직업, 재산, 가족관계 등을 따지는 경우도 있어 ‘세입자 고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020년 10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에선 전세 매물을 보려고 10여 명이 아파트 복도에 길게 줄을 선 사진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계약을 희망하는 ‘예비 세입자’가 많아 제비뽑기로 계약자를 정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한국 특유의 주거제도인 전세는 그동안 서민 주거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통해 이자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세입자에게는 목돈을 모아 내 집 마련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전세 제도가 유지되려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최근 정부가 무자본 갭투자를 막는 등의 전세사기 대책을 내놨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주인 동의 없이도 악성 임대인 여부와 체납 세금 유무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신속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