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공유
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오피니언

베네치아 가장 화려한 궁전에 펼친 회색빛 폐허[영감 한 스푼]

입력 2022-09-27 03:00업데이트 2022-09-27 05:02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간의 불완전함 고찰한 안젤른 키퍼
이탈리아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에서 두 번째로 큰 ‘스크루티니오의 방’을 가득 채운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의 대형 회화 작품. 베네치아에서 가장 화려한 공간에 쓸쓸한 폐허가 열린 듯하다. 키퍼는 이 작품들에 베네치아 철학자 안드레아 에모를 인용해 ‘이 글들은 불에 탄 다음에야 빛을 발할 것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베네치아시립미술관재단·가고시안 제공
김민 국제부 기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관문과도 같은 산마르코 광장에 가면 1340년 지어져 베네치아 총독 관저로 쓰였던 두칼레 궁전이 있습니다. 여행자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유명한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건넜다는 ‘탄식의 다리’가 여기에 있죠. 가장 베네치아다운 건축물이라고 불리는 이 궁전에는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같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으로 현대미술가가 대규모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미술가 안젤름 키퍼(77)입니다. 키퍼는 이 궁전에서 두 번째로 큰 ‘스크루티니오의 방’에 무엇을 펼쳐 보였을까요?

가장 화려한 곳에 가장 덧없는 것을


키퍼는 화려한 금박 장식 천장화로 가득한 스크루티니오의 방 네 벽을 엄청나게 큰 회화로 뒤덮었습니다. 그림들은 불에 그슬린 듯 어두운 톤이 주를 이룹니다. 그 속에는 사람은 없이 텅 빈 옷, 자전거, 마차가 유령처럼 허공을 떠다닙니다. 공허함을 극대화하는 것은 회색 덩굴에 둘러싸인 관입니다. 힘없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빛바랜 금속 관에는 납으로 만든 해바라기가 놓여 있습니다.

베네치아 수호성인 산마르코의 유해를 텅 빈 관 속에 놓인 해바라기로 표현한 작품 일부. 해바라기는 안젤름 키퍼가 즐겨 쓰는 재료인 납으로 만들었다. 베네치아시립미술관재단·가고시안 제공
키퍼는 베네치아의 가장 화려한 공간에 이처럼 쓸쓸한 폐허를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키퍼는 이번 작품이 철학자 안드레아 에모(1901∼1983)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에모는 베네치아 출신 철학자이지만 살아있을 때 단 한 편의 글도 발표하지 않고 무명이었다가 뒤늦게 발견된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은 ‘존재와 무(無)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동시에 성립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누군가가 태어나 죽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크루티니오의 방의 번쩍이는 천장화 옆에 거대한 폐허를 펼쳐 놓음으로써 키퍼는 화려함과 공허함,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추측은 작품 제목 ‘이 글들은 불에 탄 다음에야 빛을 발할 것이다’로도 입증됩니다. 에모가 자신의 글에 대해 말한 것을 그림에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나치즘 없나?’ 도발하다

키퍼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이기에 베네치아 대표 공간에 이런 과감한 연출을 허락받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키퍼가 존재감을 알린 계기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키퍼가 나고 자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의 굴욕감과 죄책감이 여전했고, 특히 나치를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됐습니다. 이때 24세 예술가 키퍼가 ‘점령’이라는 제목의 도발적 사진집을 발표합니다. 그는 나치가 점령했던 유럽 곳곳에서 한 팔을 뻗어 앞으로 내미는 나치식(式) 경례를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분노한 독일 사회는 키퍼가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 나치식 경례는 우스꽝스럽습니다. 키퍼는 건물에서 떨어질 듯, 파도에 휩쓸릴 듯 위태롭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묻어버리지 말고 정면으로 꺼내 이야기해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실패’ 원인은 복잡한 인간 본성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죠. 이 같은 작품은 오히려 유대인 컬렉터들의 눈에 띄면서 키퍼는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나아갈 수 있다


베네치아에 열어 보인 폐허와 나치식 경례로 독일 사회에 던진 도발을 보면 키퍼의 예술 세계는 ‘인간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라는 질문을 건네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시절 종교(가톨릭)의 깊은 영향으로 한때 교황이 되기를 꿈꿨다는 키퍼는 스스로도 완벽에 집착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이해하려 종교와 법을 공부하며 모든 것은 인간이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도구임을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서울 리움미술관에서도 키퍼의 작품 ‘고래자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펼쳐진 별자리를 땅 위에 있는 해바라기 씨로 표현했습니다. 흩뿌려진 별 가운데 과학자들이 붙인 행성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인간이 새로운 믿음 체계로 삼는 과학 역시 불완전함을 보여줍니다. 키퍼는 인터뷰에서 우주를 언급하며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우주에는 수십억 개 은하가 있고, 그 은하 속에는 수십억 개 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에 당신이 서 있고요. … 그 속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 에모는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알았고, 단지 불에 탈 때 약간의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죠.”

키퍼는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비관주의자일까요? 그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다”라며 “폐허는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개념 비틀기에서 나아가 삶에 관한 통찰과 문학적 차원으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사색을 키퍼의 작품으로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영감 한 스푼’은 뉴스레터로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다음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이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


김민 국제부 기자 kimmin@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최신기사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