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과오 용서 바란다”…유족 “평소 말씀, 통일 당부도”

유성열 기자 , 장관석 기자 , 김윤이 기자 입력 2021-10-27 03:00수정 2021-10-2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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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 6·29 선언 주역
‘보통사람’ 내건 첫 직선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취임사에 앞서 선서를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동아일보DB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병원은 이날 낮 12시 45분 저산소증 등으로 응급실로 이송된 노 전 대통령이 오후 1시 46분 사망했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샘암 수술을 받고 2008년 희귀병인 소뇌위축증 판정을 받는 등 투병 생활을 해 왔다. 서울대병원은 “장기간의 와상(누워서 생활하는 것) 상태와 여러 질병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신군부의 핵심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12·12쿠데타를 주도했고, 전두환 정권 2인자로 떠올랐다. 1987년 대통령 간선제 호헌 조치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하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이른바 ‘1987년 체제’의 계기가 됐으며 그는 개헌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족 측은 이날 “아버지께서 평소에 남기신 말씀”이라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내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주요기사
‘보통 사람’을 슬로건으로 내건 노 전 대통령은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북방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90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선언한 3당 합당은 거대 보수정당의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 4000억 원의 비자금 조성과 내란 등의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돼 1997년 징역 17년, 추징금 약 2629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같은 해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고, 추징금은 2013년 완납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 씨, 아들 재헌 씨가 있다. 빈소는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에 차려지며 발인은 30일이다.

12·12쿠데타 가담, 6·29선언 거쳐 대권… 퇴임후 비자금 투옥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입교

12·12쿠데타(1979년), 6·29선언(1987년), 3당 합당(1990년), 비자금 사건(1995년)….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관련된 한국 정치의 역사적 사건은 지금도 국민의 뇌리에 생생하다. 신군부 핵심으로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그는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1988년 제13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러나 취약한 지지 기반과 사회 혼란 등으로 조기에 레임덕이 찾아왔다. 특히 퇴임 2년여 만에 터진 4000억 원 비자금 사건으로 퇴임 후 결국 법정에 서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등 순탄치 않은 인생을 보냈다.

○ 군인에서 대통령으로, 그리고 3당 합당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지휘부
육사 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으로 9사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에 가담했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그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내무부 장관 등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85년에는 2·12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며 ‘후계자’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시하고 ‘호헌(護憲·현행 헌법 유지) 선언’을 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와 어우러졌고 민심은 극도로 이반됐다.

1987년 민주 정의당 대선 후보로 지명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하는 6·29선언 발표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전국으로 퍼져 갔고, 그해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수용,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 항의 ‘6·29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같은 해 대선에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야권이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분열된 상황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3당 합당’ 발표 1990년 1월 22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전 대통령(가운데)이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왼쪽)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함께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은 오늘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뿌리가 됐다. 동아일보DB
1988년 13대 총선에서 최초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탄생했고, 노태우 정권은 정계 개편을 도모했다. 1990년 1월 노 대통령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국민의힘의 전신)이 출범해 거대 보수정당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미 노 전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있었다. 1992년 김영삼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9월 18일 노 전 대통령은 민자당을 탈당했다.

○ 4000억 원 비자금과 기나긴 투병 생활
김영삼 정부 들어 12·12쿠데타에 대한 단죄 여론이 불길처럼 일었다. 1995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그해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비자금 규모는 4000억 원에 달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 최초로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고 결국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군 형법상 내란 혐의 등으로도 추가 기소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최종 징역 17년, 추징금 2629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1997년 12월 18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고, 2013년 9월 230억 원을 마지막으로 16년 만에 추징금을 완납했다.

그는 퇴임 후 외부 활동을 삼간 채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다. 지병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2002년 미국에서 전립샘암 수술을 받았고, 2008년에는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 판정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 재헌 씨는 2019년 이후 매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면서 사죄의 뜻을 표해 왔다.




소련-中과 수교 ‘북방외교’, 범죄와의 전쟁 성과… 정경유착 논란도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최선언

‘부당한 부(富)의 축적이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결실을 거두며 장래를 설계하는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1988년 2월 25일·제13대 대통령 취임사)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공과(功過)는 엇갈린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는 중국, 소련과 수교로 이어지며 탈냉전 외교의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5공 체제의 연장선이라는 태생적 한계 속에 전두환 정권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임기 중 국제수지 악화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경제 불안이 초래되기도 했고 정경유착 논란이 이어졌다.

○ 북방 외교로 탈냉전 외교 새 지평
1989년 청와대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남
소련과 수교 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모스크바 선언’에 서명하는 모습. 당시 노 대통령은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북방 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동아일보DB
북방 외교는 노태우 정권이 야심 차게 추진한 정책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7 선언’으로 불리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북한과의 적대적인 대결관계를 청산하고 관계개선에 나설 것이며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공개했다. 헝가리와의 첫 수교로 물꼬를 튼 북방정책은 이후 폴란드 유고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거의 모든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로 이어진다.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성사는 한국 외교의 폭을 크게 넓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1991년 북한과 함께 제46차 유엔총회에서 161번째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1991년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남북 기본합의서는 지금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으로 여겨진다. 1989년에는 분단 이후 첫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2년 중국 방문해 양상쿤 국가주석과 회동

첫 직선제 대통령에 오른 노 전 대통령은 나름대로 ‘5공화국 청산’도 시도했다. 5공화국 비리 특별수사부를 만들어 군사정권 관련자 일부를 사법처리한 것이다. 헌법재판소 설치와 지방의회 구성을 통한 지방자치제 부활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범죄와의 전쟁’도 업적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조직폭력배가 상당 부분 근절돼 치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통 사람’ 슬로건으로 당선됐던 그가 대통령에 대한 각계의 풍자를 폭넓게 허용한 점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 5공 연장선이라는 태생적 한계
1997년 12·12 군사쿠데타 및 뇌물 등으로 징역 17년형 확정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의 연장선에서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경력이 관리된 ‘체제 순응형’ 지도자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노태우 정부와 관련해 “군복에서 양복으로 갈아입는, 완전 문민화 이전의 중간 단계”, “권위주의 세력과 저항세력 어느 쪽도 국면을 완전히 주도할 수 없는 ‘타협에 의한 민주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경제 분야의 점수는 낮다. “보통사람들의 편안한 시대를 만들기 위해 물가 상승을 막겠다”고 공언했지만 1990년 물가 상승률이 9.9%로 치솟았다. 다만 연평균 8.4%대 경제성장과 1963년 이래 가장 낮은 실업률(2.3%)을 기록해 대체로 경제지표를 건전하게 유지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수서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런 정경유착으로 인해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관련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김윤이 기자 yun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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