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비밀 품은 ‘19금’ 흙인형[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1-09-07 03:00수정 2021-09-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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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95호 ‘토우 장식 장경호’. 1973년 현 경주 대릉원 일대에서 발굴된 높이 34cm의 이 항아리에는 사랑을 나누는 남녀, 임신부, 새, 거북, 뱀 등이 장식돼 있다.(왼쪽 사진), 1926년 경주 황남동에서 출토된 흙인형 중 하나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길이 5.7cm.(오른쪽 위쪽 사진) , 국보 91호 기마인물형 토기 주인상(높이 26.8cm·왼쪽)과 시종상(높이 23.4cm). 6세기 초 만들어진 이 토기는 신라 왕자와 시종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오른쪽 아래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신라 고분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진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등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수만 점씩의 유물이 출토되므로 그것을 제대로 정리해 내는 데 수십 년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러나 신라 고분에서는 고구려의 벽화나 백제의 묘지석처럼 무덤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유물이 많지 않아 고고학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는 유물이 흙인형(토우·土偶)이다.

신라 흙인형은 일제강점기 경북 경주 황남동에서 무더기로 수습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경주 쪽샘지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굴됐다. 투박한 모양에 얼핏 보면 대충 만든 것 같지만 여기에는 역동적인 신라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6세기 자그마한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 신라 흙인형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에로틱한 흙인형의 출현

1926년 5월 20일 조선총독부로 전해진 한 통의 전보. 경주 황남리(현 황남동)에서 신라 무덤 여러 기가 훼손된 채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급히 현지로 파견된 총독부 직원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참혹했다. 무덤 일부가 잘려 나가기도 했고 여기저기 토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당시 일제 철도국은 현 천마총 주변에 경동철도 경주정차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대지 조성에 필요한 토사를 주변에서 조달하려 했다. 공사 대상지 주변에는 황남대총, 천마총 등 거대 고분이 즐비했으나 무덤들 사이는 밭으로 경작 중이었다. 그들은 밭을 파서 토사를 채취하기로 하고 인부를 동원해 땅을 파던 중 무덤 다수를 훼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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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직원들은 공사를 중지시키고 서둘러 유물을 수습했다. 출토 유물 대부분은 파손된 토기였는데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유물이 섞여 있었다. 크기가 5cm도 채 안 되는 작은 조각들이었는데 남녀의 성기가 지나치게 강조돼 있었고 게다가 외설적 자세까지 취하고 있었다.

그제야 철도국은 총독부박물관과 협의를 시작했다. 경주 곳곳이 유적인지라 토사 채취가 쉽지 않음을 인지했기에 철도국 예산으로 박물관이 폐고분 하나를 파주면 그 부산물로 나오는 흙을 정차장 건설공사에 쓰기로 합의했다. 그 폐고분이 바로 스웨덴 왕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서봉총이다.

매끈한 토기에 부착된 투박한 장식

1973년 정부가 경주 황남동에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현 대릉원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다. 경북대박물관 조사팀은 C지구 발굴에 투입됐다. 조사 구역의 겉흙을 걷어내자 여러 기의 작은 무덤들이 빼곡히 자리해 있었다. 그중 30호 묘라 이름 붙인 무덤은 자그마했는데 내부에서 목이 길쭉한 토기 한 점이 모습을 보였다. 바로 국보 195호 ‘토우 장식 장경호’가 발굴되는 순간이다.

이 토기의 어깨와 목에는 다양한 장식이 붙어 있다. 개구리와 거북, 뱀, 새 등 동물들이 있고 그 사이에 조용히 앉아 현악기를 연주하는 임신부, 그리고 주변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열정적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가 있다. 모두 나신이며 여성은 무릎을 꿇고 뒤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고 남성은 그 뒤에서 성기를 드러낸 채 꼿꼿이 서있는 모습이다. 전체 구도는 마치 캔버스에 그린 그림처럼 여러 인물과 동물들이 유기적으로 배치돼 있다. 토기는 여타 토기처럼 잘 만들어졌지만 부착된 장식물은 손가락으로 쓱쓱 빚어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거친 터치가 오히려 자연스러움과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왜 이처럼 외설적 장면을 토기에 표현했고 그것을 망자의 안식처에 묻어 줬을까. 학자들은 신라 사회에 만연한 개방적 성 풍속의 산물로 보기도 하고, 다산과 풍요를 희구하며 만든 제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왕자의 저승길에 함께한 토우

통상 신라 흙인형은 그릇 뚜껑이나 몸체에 부착된다. 이와 달리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흙인형 두 점은 독립 조형품이자 술이나 물을 담을 수 있는 주자(注子)로서의 실용성을 갖추고 있어 특이하다.

1924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박물관 직원들은 총독의 지시를 받아 경주 노동리에서 폐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불과 보름 만에 무덤 주인공의 유해부에 도달했고 당초 기대했던 금관을 발견했다. 그런데 금관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두 점의 토기였다. 이 두 점의 기마인물상은 형태가 꽤나 다르다.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주인은 좀 더 크게, 평상복을 입은 시종은 조금 작게 만들었다. 그런데 주인상의 얼굴을 보면 신라의 여타 흙인형과는 달리 마치 누군가를 모델로 한 것처럼 정교하다.

학자들은 주인상의 실제 모델이 무덤에 묻힌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금령총은 봉황대고분에 딸린 왕족묘다. 또 출토 유물의 구성이나 황금 장신구의 크기가 작은 점 등으로 보아 무덤 주인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신라 왕자로 추정된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신라왕은 아들의 명복을 빌면서 당대 최고 장인을 시켜 왕자와 그를 수행할 시종의 모습을 제기로 만들게 했을 수도 있다.

5세기 이후 신라는 괄목상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백제와 손을 잡고 각지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에 더해 각지의 물산이 경주로 모였고 그것을 토대로 신라 왕경인(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들은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고 수많은 물품을 묻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자그마한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흙인형을 보면 5∼6세기 신라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우 역동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흙인형에 표현된 솔직한 성 표현, 희로애락의 모습이 실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인지 다소 논란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상상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발굴된 흙인형에 다양한 조명이 더해져 아직 미지의 영역인 마립간기(麻立干期·4∼5세기) 신라사 해명의 빗장이 풀리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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