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질주한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3-29 03:00수정 2021-03-2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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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영화 ‘미나리’와 식물 세밀화
일러스트레이터 조현진 작가가 그린 미나리 세밀화. 조현진 작가·
※이 글에는 ‘미나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 유학 막바지 시절 이야기다. 졸업이 다가오니 새삼 취업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지난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니, 무작정 귀국한다고 취직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구직활동을 하게 되었다. 지원서를 준비하던 내 모습을 보던 미국인 친구가 충고했다. “이 지역은 지원하지 마라. 미국에서 오래 살지 않은 너로서는 적응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면서 지목한 지역이 미국의 아칸소주와 앨라배마주였다. 영화 ‘미나리’는 바로 그 아칸소주에 이민 온 한국인 가족의 적응기를 담았다.

영화 보는 내내, 옛 친구에게 새삼 감사했다. 그 정도로 ‘미나리’의 주인공들은 고생을 거듭한다. 어떤 사연에서인지 그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 아마도 한국에서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이 처음 정착을 시도한 지역은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 도시 지역. 그러나 그곳 한인들과 어떤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아칸소의 시골 지역으로 다시 이사한다.

영화 ‘미나리’에서 아칸소로 이주한 가족의 막내아들 데이비드를 연기한 아역 배우 앨런 김. 판씨네마 제공
아칸소로의 이주는 일종의 배수진인 셈이다. 그러나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의 배수진과 수영 할 줄 모르는 사람의 배수진은 다르다.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하는 병아리 감별과 농장 경영은 버겁기 짝이 없고, 그 버거움을 견디기 위해 신앙에 의지해보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다. 마침내 그들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서 할머니가 온다. 적응이 어렵다는 이국땅이건만, 어디든 잘 적응하는 여러해살이풀 미나리처럼 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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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도움이 된다. 손주와 놀아주기도 하고, 집안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인근 계곡에 미나리를 심기도 한다. 미나리를 심은 계곡에서 뱀을 발견한 손주에게 할머니는 말한다. 저렇게 자신을 드러낸 것은 무섭지 않다고.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다.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 표면이 있고 저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은 어느 날 예상치 않게 표면으로 떠올라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다.

할머니 몸속 어떤 저류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이라는 형태로 표면에 떠오른다. 이제 할머니는 말도 어눌하고 거동도 부실하다. 그러나 여전히 분투 중인 딸 내외에게 도움이 되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 법.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쓰레기를 모아 태우다가 그만 할머니는 그해의 결실이 모여 있는 창고에 불을 내고 만다. 뇌졸중으로 몸을 빨리 움직일 수 없어서, 불타는 창고를 망연히 보고 있어야만 한다.

삶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결과를 다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기피하고, 쉽게 단정하는 이들을 의심하며,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들을 경계하고, 쉽게 확신하는 이들을 불신한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삶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영화 ‘미나리’는 “버티라”고 말한다. 미나리는 버티는 식물의 대명사다. 실로, 삶에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아이러니가 있기에 희망도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불행이 있는 만큼 예상치 못했던 선물도 있다. 아칸소주 시골로 이사 왔을 때, 그 환경변화가 손자의 심장 상태를 개선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쁜 일만 있는 게 삶이라면, 삶은 예측 가능하리라. 삶은 예측 가능하지 않기에, 좋은 일도 있다. 삶의 아이러니는 좌절할 이유도 되지만, 버틸 이유도 된다.

블랙베리를 그린 식물 세밀화.
이 보통 사람들이 버텨내는 모습을 집약한 장면이 바로 영화 말미에 가족들이 마루에서 모여 자는 장면이다. 정이삭 감독은, “함께 마루에서 잠든 가족에 매료되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모여 자고 있는 모습은, 식물 세밀화를 연상시킨다. 대단한 스펙터클을 묘사하기를 거부하고, 조용히 존재하는 식물에 주목한 묘사의 전통. 그리스의 식물학자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기원후 1세기)의 ‘약물지(De Materia Medica)’에게로 소급되는 이 식물화 전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나리 세밀화를 그린 바 있는 식물화가 조현진은 ‘식물문답’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화가 엄유정은 바로 얼마 전까지 ‘FEUILLES’라는 식물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영화 ‘미나리’는 카메라로 촬영한 식물 세밀화다. 미국 아칸소주 벌판의 어느 집에 영웅이 아닌 이민자들이 모여 자고 있다. 이들이 공적인 영웅이 아니라고 해서 각자 삶에서마저 영웅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미나리’에는 실로 영웅적인 장면이 있다. 창고를 태웠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정처 없이 떠나는 할머니를 붙잡기 위해, 심장이 부실한 손자가 질주를 시작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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