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입법 만능주의’ 유통법, 안하무인 쿠팡 키웠다

  • 동아일보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지난주 국회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 청문회에서 쿠팡이 보인 무성의한 태도에 여야 국회의원은 “국회와 국민을 무시한 행위” “김범석 의장이 출석하지 못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라며 질타를 쏟아냈다. 국회 불호령에 쿠팡은 통역을 거친 채 동문서답으로 대응하며 국민은 안중에 없다는 듯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해야 할 건 쿠팡이 보여준 안하무인 태도만이 아니다. 10년 넘게 쿠팡이 거침없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건 누가 뭐래도 국회다. 노동자 건강권, 전통시장 보호를 명분으로 국회가 쌓아 올린 각종 규제가 아이러니하게도 ‘검은 머리 외국기업’ 쿠팡을 키웠다.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어설픈 규제를 쏟아내는 입법 만능주의의 결과물이다.

시대 변화 못 읽고 어설픈 규제 쏟아내

‘대규모 점포 종사 근로자 건강권을 보호하고, 대·중소 유통업 상생 발전과 지역 상권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2013년 7월부터 시행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 이유에는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노동권 보호 논리와 대형마트 규제 기본 논리가 담겼다. 노동자 휴식권 보장, 전통시장·소상공인 보호, 재벌 산업 장악 방지 등 ‘착한 명분’이 한데 묶이면서 유통법은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문제는 이 명분이 노동 현실과 미래에 나타날 산업 혁신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했는가다.

국회가 앞세웠던 노동권 보호 논리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주말·심야 노동을 줄이고, 대형마트 노동자에게 ‘남들 쉴 때 쉴 권리’를 주겠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근로자 건강권은 오프라인 대형마트라는 특정 업종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됐다. 어떤 노동을 보호할지에 대한 기준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정해졌다.

월 2회 의무휴업, 심야영업 제한에 묶인 오프라인 유통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갔다. 대형마트 신규 출점은 사실상 차단됐고, 기존 점포를 물류 거점으로 전환해 온라인과 경쟁하겠다는 제안도 ‘재벌 대기업 특혜’라는 이유로 좌절됐다. 노동을 보호한다는 규제는 결과적으로 국내 자본을 위축시키는 장치로 작용했다.

근로자 건강권과 전통시장 상생을 내세워 미국, 일본에는 없는 방식으로 규제하는 사이, 무주공산을 파고든 건 쿠팡이었다. 6조 원 이상 누적 적자를 감수하며 인프라를 구축했고, 새벽 배송을 일상화하며 소비자 생활 방식을 바꿨다. 가격, 편의성 경쟁력에서 한계가 명확했던 전통시장은 물론, 대형마트조차 쿠팡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유통 중심은 규제가 집중된 오프라인에서 규제 사각지대인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눈에 보이던 대형마트 일자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물류센터 노동과 새벽 배송으로 대체됐다. 노동권을 앞세운 규제가 오히려 노동의 질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동한 셈이다. 노동자는 규제로 자신이 보호받는 곳이 아닌, 구인 공고가 많이 나오고 임금을 높게 주는 곳으로 간다.

대형마트 규제에는 목소리를 높이던 정치권이, 쿠팡 앞에서는 김범석 의장 하나 불러내지 못하며 목청만 높이고 있다. “여기 와서 기쁘다(Happy to be here)”라는, 경우에 안 맞는 외국인 사장의 인사말은 쿠팡 앞에서 국회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국회, 입법이 미치는 영향력 성찰해야


오늘날의 쿠팡은 규제하기 쉬운 대상만 골라 때려 온 한국 정치가 낳은 통제 불가능한 독점 기업에 가깝다. 괴물을 키운 뒤에야 뒤늦게 꾸짖는 게 오늘날 한국 정치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법이 유통법뿐이겠는가. 국회가 자신들이 하는 입법이 국가 미래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철저히 성찰하지 않는다면, 제2의 쿠팡 대란은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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