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기는 ‘문재인보유국’ 뛰는 ‘차이잉원보유국’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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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출발, 다른 길 가는 文-차이(蔡)
‘기업은 개혁 대상’ 인식 못 버린 文
‘중국어-영어 2언어 정책’까지 거침없는 蔡
이대론 대만 발뒤꿈치 쳐다볼 날 올 수도

천광암 논설실장
천광암 논설실장
‘국가는 크지 않아도 되지만 의지는 커야 한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지론이다. 4년 전쯤이라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서 이무기로 전락한 국가 지도자의 자기 위안 정도로 치부됐을 것이다. 차이 총통이 처음 당선된 2016년과 집권 초기만 해도 대만 경제는 그만그만한 중소기업의 집합체, 중국의 하청공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대만은 ‘용의 귀환’을 선언한 듯하다. 지난해 한국 미국 일본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와중에도 대만은 2.98% 성장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9.9%나 증가해 조만간 한국을 추월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다.

국제사회의 시선도 달라졌다. 영국의 정치·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은 지난달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서 대만을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라고 극찬했다. 프랑스의 주간지 르푸앵은 지난해 12월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커버스토리의 표지 그래픽으로 5명의 정치지도자가 육상트랙을 도는 모습을 실었다.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차이 총통이었다.

대만의 약진에는 두 개의 원동력이 있다. 하나는 익히 알려진 ‘T방역’이다. 대만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985명에 그칠 정도로 방역에 성공했다. 다른 하나는 차이노믹스다. 차이 총통은 문재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 후보로 출마해 집권했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인상 등을 공약으로 내건 점도 비슷하다. 그런데 어디에서 J노믹스와 차이노믹스의 길이 갈린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이 ‘민간’을 보는 관점이다. 차이 총통은 “정치 분야에서는 함께 힘을 모아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민간 부문은 많은 사람의 참여를 끌어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민간 기업=개혁 대상’이라는 운동권적 시각에 발목이 잡혀 있는 모습이다. 기업계가 여당에 여러 차례 읍소하면서 입법 재고를 요청한 상법 개정안 등 3법에 대해 문 대통령은 “기업을 건강하게 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라며 기업계와는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인 바 있다.

민간에 대한 인식 차이가 성과 차이로 이어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해외진출 자국 기업의 유턴 정책이다. 차이잉원 정부는 2019년 초부터 금융 세제 용수 전력 인력 지원을 묶은 패키지를 만들어, 해외에 나가 있는 대만 기업들에 유턴을 제안했다. 2년여 기간 동안 209개 기업이 제안에 응했다. 총 투자금액은 31조9139억 원, 창출되는 일자리는 6만5552개에 이른다.

한국에도 유턴을 지원하는 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실적은 한심하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이후 작년 5월까지 총 실적은 36건. 반면 2018년 한 해에만 한국 기업이 해외에 세운 신설법인 수는 3540개에 이른다. 유턴은 고사하고 한국을 떠나려는 탈출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차이 총통은 진보정당 지도자이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거침이 없다. ‘2언어 국가’ 정책이 대표적이다. 2030년까지 대만을 중국어와 영어가 모두 통하는 나라로 바꿔 놓겠다는 계획이다. 영어 장벽이 없어지면 글로벌 기업 유치가 쉬워지고, 대만 기업들의 글로벌 비즈니스도 활발해져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복안이 엿보인다.

경제정책의 요체는 ‘사다리’와 ‘그물(안전망)’의 조화라고 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튼튼한 그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려면 ‘소기업은 중기업으로, 다시 중기업은 대기업으로’, ‘하류층은 중류층으로, 중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많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노믹스는 균형을 잡아 왔다. 하지만 J노믹스는 세금알바 같은 ‘그물’에만 매몰돼서 성장 사다리에 별 관심이 없다. 한술 더 떠서 한국의 정부·여당은 세금폭탄으로 사다리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 사회 내부의 성장 사다리가 하나둘씩 허물어져 내릴 때의 결과를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이 1인당 소득 4만, 5만 달러대의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자체가 치워질 것이다. 이대로 가면 대만의 발뒤꿈치만 하릴없이 올려다볼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문재인보유국#차이잉원보유국#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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