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능력껏 보상받는다’는 말은 진실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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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대니얼 마코비츠 지음·서정아 옮김/504쪽·2만2000원·세종서적

‘엘리트 세습’의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는 미국의 명문대가 엘리트 계층의 특권 세습을 위한 통로로 활용된다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의 불평등을 부른다고 지적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예일대, 하버드대 캠퍼스. ⓒKing of Hearts/Wikimedia Commons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엘리트 세습’의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는 미국의 명문대가 엘리트 계층의 특권 세습을 위한 통로로 활용된다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의 불평등을 부른다고 지적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예일대, 하버드대 캠퍼스. ⓒKing of Hearts/Wikimedia Commons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절규는 인간의 가치가 출생으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누구의 자녀이냐가 특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혁명을 거치며 귀족제도가 무너지고 노력과 재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도래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 불평등과 새로운 카스트 창출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계층을 분리하고, 엘리트 계층이 세대를 거쳐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소득을 점유하는 소수의 중심부(1%)와 그 주변부(5∼10%)로 구성되는 미국 엘리트 계층은 탁월한 교육과 윤택한 일자리의 독과점을 통해 능력주의의 높은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금융부문 전문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1500 기업 부사장, 엘리트 경영 컨설턴트, 일류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 전문의 등 상위 근로자인 엘리트 계층은 자녀에게 명문 유치원서부터 명문 대학(로스쿨, MBA)까지 최상위 교육의 특권을 대물림한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는 소득수준 상위 1% 가구 출신이 하위 50% 출신보다 더 많다. 이런 ‘능력 상속’은 자녀에게 약 1000만 달러를 양도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 학생들은 번지르르한 직업을 가질 확률이 더 높다. 미국 동·서부 해안 명문대(아이비리그, 스탠퍼드대)는 월스트리트(금융 법률)와 실리콘밸리(정보기술·IT)를 장악한다.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이라는 특권이 서로를 뒷받침하고 같이 성장한다.’

각 분야에서 이들은 혁신을 통해 자신 같은 초고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해 중간 숙련 근로자에게서 할 일을 빼앗는다. 이는 중산층의 쇠퇴를 가져오며 중산층 자녀는 ‘부모에게 허용되지 않은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엘리트 계층이 귀족처럼 안락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고급 변호사, 금융전문가, 전문의 등은 주당 90시간 노동한다. 노력은 유행병처럼 퍼져 ‘요람에서 무덤까지 상위 직업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스스로를 착취해 고소득을 얻는 능력주의의 병폐다.

따라서 능력주의 시대의 불평등은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에서 자본으로 소득이 이전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상위 1%와 최상위 0.1%는 소득의 3분의 2∼4분의 3을 자본(토지 기계 금융)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기량, 인적 자본을 통해 얻는다.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 아니라 상위 근로자와 중산층 간의 갈등이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위기에 몰린 중산층 백인의 중년 사망률과 기대수명이 하락한 것에서도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던 엘리트 계층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한심한 패거리(deplorables)’라 불렀다. 능력주의라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부유층’은 중산층의 고충과 분노를 알지 못했지만 트럼프는 능력주의의 위선과 불만을 알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능력주의 해소를 위해 명문대의 입학 정원을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고, 그중 절반을 소득수준 하위 3분의 2 가구의 학생으로 뽑지 않으면 대학의 면세 혜택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예일대 수학과, 런던정경대 경제학 석사, 옥스퍼드대 철학박사인 저자는 능력주의의 최대 수혜자다. 저자도 스스로를 “능력주의의 덫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엘리트 세습#대니얼 마코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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