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황홀한 달콤함이여[스스무의 오 나의 키친]〈81〉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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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은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속에 활짝 핀 배꽃 한 줄기가 봄비에 젖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배는 중국, 한국과 일본, 서양종 등 크게 3종류로 현재 전 세계에서 약 3000종이 자란다. 중국인들은 하얀 꽃이 마치 눈처럼 뭉쳐 보이는 배꽃을 배눈(梨雪)이라고 부르며 좋아해 매년 봄 배꽃 축제를 곳곳에서 연다.

아삭한 식감이 특징인 아시아산 배는 배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돌세포를 지니고 있다. 이 돌세포는 위에서 소화되지 않고 마치 섬유소 역할을 하며 장에서 배출된다. 유럽 배처럼 종 모양인 중국 배도 있지만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배는 전반적으로 식감이 더 아삭하다. 유럽 배에도 돌세포가 들어 있지만 함량이 적어 더 부드럽다.

아시아 배는 잘 익은 상태에서 수확하기 때문에 구매 즉시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꽃이 떨어진 부분에서 산소와 당분, 수분을 스스로 흡수해 맛이 덜해진다.

반면에 유럽의 배는 단단하고 덜 익었을 때 수확한다. 저장고에서 후숙 과정을 통해 향기롭고 달콤하며 부드러운 상태가 되면 냉장고에 보관한다. 잘 알려진 품종으로는 코미스, 바틀렛, 라프랑스 등이 있다.

아시아 배는 수분이 많기 때문에 생으로 먹거나 샐러드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 한국에서 더운 여름 즐기는 냉면이나 육회에 곁들이는 배는 아삭한 식감에 한번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그 황홀한 맛을 아는 친구와 친척들도 한국에 올 때마다 찾는 메뉴다. 유럽의 배는 조리용 또는 날것 그대로 폭넓게 사용된다. 와인 안주로 치즈, 살라미 등과 함께 잘 어울리는 과일이다. 샐러드에 넣어 먹거나 젤리, 잼을 만들기도 한다. 배 사이다 같은 음료나 술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기도 한다.

한국의 배숙과도 흡사한 요리가 있다. 배 껍질과 중앙의 씨방의 딱딱한 부분을 제거한 후 각종 향신료와 시럽이나 꿀물을 넣고 삶아 부드럽게 만든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배 요리로 1864년경 프랑스의 ‘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가 만들었다. 요리 이름은 ‘푸아르 벨 헬렌’이다. 헬렌은 ‘헬레네’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리스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제우스 신의 딸이다.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그녀를 납치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내용의 일부이다.

에스코피에가 양귀비와 배에 관한 시도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과 얽힌 배와 함께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소스가 곁들여져 있는 디저트가 눈앞에 있다면 누가 감히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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