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아들 딸[횡설수설/박중현]

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0-09-22 03:00수정 2020-09-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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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1952년 3월 한국으로 떠나기 전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중위(당시 27세)는 이런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미 8군사령관인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이 있는 한국전선으로 전출을 자원한 그는 3월 19일 자신이 조종하는 B-26 폭격기 승무원들과 함께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보름여 뒤인 4월 4일 밴 플리트 주니어는 압록강 남쪽으로 비행을 나갔다가 실종됐다. 네 번째 출격이자 첫 단독 비행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얼마 안 돼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수색작전을 중단시켰다. 며칠 뒤 부활절에 장군은 한국군 실종 장병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육군사관학교와 한국군 육성에 크게 기여해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군은 100세에 눈을 감을 때까지 평생 외아들을 그리워했다.

▷대를 이어 군복무하는 걸 명예로 여기는 미국에서는 전사한 유력인 자제들이 적지 않다. 본인이 미-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남과 차남은 모두 프랑스 노르망디 미군 묘지에 묻혀 있다. 차남은 1차대전 때 전투기를 조종하다 전사했다. 장남은 전사하진 않았지만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2차대전 때 어뢰정 정장(艇長)으로 복무했고 조종사였던 맏형은 군용기 사고로 숨졌다.

▷벨기에 왕립육군사관학교 진흙탕에서 포복하며 훈련하는 왕위 계승 서열 1위 엘리자베트 공주의 모습이 화제다. 훈련 기간은 1년으로 호칭부터 일체의 ‘공주 대접’은 없다고 한다. 아버지 필리프 국왕에 이어 장차 군 최고통수권자가 될 인물인 만큼 필요한 일이지만 19세 딸을 군사훈련에 보낸 부모의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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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후 전사로 처리됐던 밴 플리트 주니어가 실은 비행기 추락 후 북한군 포로로 잡혔다가 중국을 거쳐 소련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고 밴 플리트 장군의 외손자가 최근 주로스앤젤레스 한국총영사관이 연 세미나에서 밝혔다. 육군 정보국 참모차장을 지낸 자기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밴 플리트 장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목숨 걸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명예로운 가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했다. 걱정을 숨기며 자식을 전장에 내보내고, 자식을 잃고도 눈물을 감추는 부모가 가문의 영예를 완성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밴 플리트 주니어#군복무#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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