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확보전 ‘부익부 빈익빈’우려[글로벌 이슈/황인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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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이 대학이 개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한 시민이 맞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의 최종 개발이 임박한 가운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백신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AP 뉴시스
6월 24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이 대학이 개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한 시민이 맞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의 최종 개발이 임박한 가운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백신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AP 뉴시스
황인찬 국제부 차장
황인찬 국제부 차장
“나는 선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많은 생명을 구하기 싶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매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털어놨다. 재선을 위해 백신 개발에 다걸기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자 새삼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고 나선 것.

그러면서도 그는 “대선 전 백신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미 대선의 막판 변수인 ‘10월 서프라이즈’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재회가 아니라 백신 개발이라는 말도 나온다. 미국 내 확진자가 500만 명을 넘긴 위기 상황에서 백신 개발 성공, 무료 접종 등을 선포하며 트럼프가 선거 막판 뒤집기에 나설 것이란 얘기다.

이런 기류를 반영하듯 미국 정부는 최근 치열하게 백신을 쓸어 담고 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대,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 프랑스 사노피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글로벌 제약사와 대학을 접촉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백신의 입도선매에 나선 것. 미국은 이미 7억 회분의 백신을 확보했다. 약 3억3000만 명인 미국 전체 인구가 두 번 이상 맞을 수 있는 규모다. 이런 물량 확보전에 94억 달러(약 11조2000억 원)도 쏟아부었다.

일부 선진국도 백신 확보전에 가세했다. 영국은 프랑스 제약사인 발네바와 백신 생산시설 투자 계약을 맺고 1억 회분을 받기로 하는 등 1억6000만 회분을 확보했다. 일본은 화이자로부터 백신 1억2000만 회를 공급받기로 했고, 아스트라제네카와 추가로 1억 회분 공급 협상을 타진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이 독감처럼 주기적인 접종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각국이 백신 창고 채우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제적 강국들의 백신 입도선매가 생산량 전망치마저 뛰어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개발이나 생산도 하기 전 ‘묻지 마 사재기’다. 영국 의약시장 조사업체 에어피니티 집계에 따르면 미국 영국 일본 등이 제약사로부터 선구매한 백신 규모는 13억 회 분량으로 2021년 1월 상반기까지 생산될 것으로 보이는 총 백신 생산량인 10억 회분을 뛰어넘는다. 세계 인구가 78억 명인 것을 감안하면 어떤 나라 국민은 여러 차례 백신을 맞을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구경도 못 하는 백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백신 민족주의는 좋지 않고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모두 안전해지기 전까지 어떤 국가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신의 공공재 성격을 인정해 모두에게 접근성이 제공될 때 진정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호소다.

하지만 이런 호소가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작동될지는 불투명하다. 백신 확보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은 이미 지난달 WHO 탈퇴를 공식 통보하며 독자 노선을 명확히 했다. 유럽연합은 4월 ‘코로나19 대응’ 결의안을 선보이며 백신의 공공재 역할을 강조하는 듯했으나 이후 아스트라제네카와 백신 사전 구매 계약을 마쳤다. 중국의 바이오기업 시노백은 코로나19 백신의 3상 임상시험을 브라질에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진행하며 독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필리핀 등 일부 동남아 국가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잠시 제쳐두고 중국에 ‘백신 구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백신의 소유 자체가 국제 질서를 이끄는 하나의 패권으로 이미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글로벌 제약사와 백신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이 아직 없다. 국내 제약사들의 백신 개발은 초기 단계다. 정부는 WHO, 감염병 혁신 연합(CEPI)이 주도한 백신 공급 협의체인 ‘코백스(COVAX)’ 가입에 나섰지만 이를 통해 백신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국민 전체의 20%만 받을 수 있다. 5000만 국민 중 1000만 명만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백신 확보는 국민 생명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를 하루빨리 회복시키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술력이 부족하다면 외교력을 총동원해서라도 백신 확보에 집중해야 할 때다.

황인찬 국제부 차장 hic@donga.com
#코로나#백신#확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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