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 성폭력’ 폭로하려다 피살… 분노 들끓는 美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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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근무 여군, 상급자에 맞아… 4월 실종후 2달만에 주검 발견
실종전 “피해자 많은데 신고 무시”
NYT “작년 군부대 성폭력 7825건”
추모집회-진상 촉구 시위 확산

‘바네사 기옌’ 추모 벽화 앞엔 꽃-양초 11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거리에 그려진 바네사 기옌의 
추모 벽화 앞에 추모객들이 두고 간 꽃과 양초 등이 놓여 있다. 텍사스 포트후드 기지에서 복무하던 기옌은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실종됐다가 최근 주검으로 발견됐다. 포트워스=AP 뉴시스
‘바네사 기옌’ 추모 벽화 앞엔 꽃-양초 11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거리에 그려진 바네사 기옌의 추모 벽화 앞에 추모객들이 두고 간 꽃과 양초 등이 놓여 있다. 텍사스 포트후드 기지에서 복무하던 기옌은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실종됐다가 최근 주검으로 발견됐다. 포트워스=AP 뉴시스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살해된 미국 여군 바네사 기옌(20) 사건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 군대 내 성폭력을 근절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미 전역에서 진상조사 요구도 거세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텍사스 포트후드 기지에서 근무하던 히스패닉계 병사 기옌은 4월 22일경 실종됐다. 그는 실종 전 어머니에게 “부대 부사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신고하겠다고 하자 “성폭력을 당한 다른 여군도 알고 있지만 그들이 피해를 신고해도 부대에서 무시했다”며 만류했다.

약 두 달이 흐른 지난달 30일 기지에서 약 40km 떨어진 강가에서 그의 시신 일부가 발견됐다. 그간 살해 용의자로 지목됐던 기옌의 남성 상급자 에런 로빈슨은 이날 밤 부대를 탈출해 자살했다. 시신의 훼손 및 유기를 도운 로빈슨의 여자친구 역시 범죄 혐의를 인정했다. 여자친구는 “로빈슨이 기옌의 머리를 여러 차례 망치로 때려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유족 측은 부대 내 성추행 때문에 기옌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실종 전 기옌은 달리기나 운동을 할 때마다 자신을 성추행한 부사관이 따라왔고, 그게 얼마나 불쾌했는지 토로했다. 어머니가 그런 짓을 못 하게 하겠다고 하자 기옌은 “내가 직접 행동을 하고, 말을 할 것”이라며 “난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기옌의 사후 한국의 일병과 비슷했던 그의 계급 ‘PFC’를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로 진급시켰다. 로빈슨 역시 스페셜리스트였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9일 의회에서 “성희롱과 성폭행을 예방하거나 피해자와 생존자를 돕기 위해 군의 조치가 충분치 않았다”고 시인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반발한다. NYT에 따르면 지난해 군인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거나 가해를 한 사건이 7825건에 이른다. 공식 조사 없이 비공개로 피해를 증언한 사건은 2126건으로 한 해 전보다 17% 늘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군대조직의 특성상 상급자의 가해에 대응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가족은 1일 수도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회 청문회를 열어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증언도 속출하고 있다. 2009∼2013년 포트후드 기지에서 복무했던 조지나 버틀러 씨는 PBS방송에 출연해 “동료 병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나와 기옌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운 좋게 살아 있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이라크 주둔을 마치고 귀국한 2009년 동료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티퍼니 서마 씨는 “상급자에게 신고했지만 바로 ‘사건을 묻어버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규탄했다.

12일과 13일에는 각각 텍사스 오스틴과 샌안토니오에서 차량을 이용한 추모집회 ‘기옌을 위한 정의’가 열렸다. 자동차, 오토바이 동호인 수천 명이 참가해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소셜미디어에는 ‘내가 바네사 기옌이다’, ‘바네사 기옌을 위한 정의’라는 해시태그(#)가 넘쳐나고 있다. 기옌을 추모하는 벽화도 미 전역에서 등장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바네사 기옌#군부대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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