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매뉴얼 무용지물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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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희롱 사례-대응방법 적시… 시장이 대상자인 경우엔 작동 안해
정부, 지자체장 성폭력 감독권 없어… 여가부 “서울시 조치 점검하겠다”

서울시가 운영해온 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이 조직의 수장인 박원순 전 서울시장(64) 앞에선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매뉴얼은 박 전 시장에게 성폭력 사건 처리의 최종적인 관리·감독권을 부여했을 뿐 시장이 가해자일 경우에 대비한 조항이 전혀 없었다.

서울시는 박 전 시장 취임 이후인 2014년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후 박 전 시장의 방침에 따라 제3자 익명 제보를 보장하고 2차 피해 방지를 소홀히 한 부서장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매년 매뉴얼을 강화해 왔지만 박 전 시장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다.

매뉴얼에는 음란 사진 전송,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한 성희롱, 격려를 빙자한 신체 접촉 등이 대표적 성희롱 사례로 적시돼 있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등의 혐의로 고소한 A 씨 측에 따르면 박 전 시장은 A 씨를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으로 초대해 음란 문자와 속옷 입은 사진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집무실 내 침실로 불러 “안아 달라”며 신체 접촉을 했다. 매뉴얼에 제시된 주요 피해 사례가 A 씨의 주장과 대부분 겹치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를 인지한 직원은 즉시 인권담당관에게 보고해야 하고 시는 독립적인 조사기구인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가해자가 산하기관의 기관장이거나 임원인 경우 즉시 시로 사건을 이첩해 지체 없이 조사한다는 조항도 있다.

하지만 지휘 계통의 종착점은 다름 아닌 박 전 시장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심의위원회의 외부 위원도 시장이 위촉한다. 박 전 시장이 가해 당사자라면 피해자로선 문제 제기 경로가 사실상 봉쇄돼 있는 것이다. A 씨 측은 “박 전 시장에게서 4년간 성추행을 당하는 동안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며 외면받았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부 역시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폭력을 감독할 권한이 없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광역자치단체는 정부의 지휘를 받지 않는 일종의 독립법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최종 감독자였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5·수감 중) 성폭행 피해자의 법률대리인이었던 서혜진 변호사는 “현행법상 지자체장이 성폭력 사건 방지와 대응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지자체장 본인이 가해자인 경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는 서울시를 상대로 A 씨의 피해 호소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 성희롱 방지 조치에 대해 점검하겠다고 14일 밝혔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박창규·전주영 기자
#서울시#성폭력 매뉴얼#박원순 전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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