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편안함을 음미하는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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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박형준 지음/9000원·156쪽· 창비

“마음속에 있는 샘의 돌/그 돌 속 하얀 점이/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동안/나는 늪가에서 초승달이 되었다가 보름달이 되었다가/그믐달로 바뀌어간다.”(‘달나라의 돌’)

한국 서정시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온 대표적 서정시인 박형준의 일곱 번째 시집. 등단 30년을 맞은 중견시인으로서의 깊이와 서정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세계를 펼쳐 보인다. 누구에게라도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음미의 시간을 선사할 만한 감각적인 시편들이 수록됐다.

햇살, 강가, 천변, 꽃, 산책로, 비, 나무, 오솔길, 아침 같은 짙푸르면서도 차분한 어휘들과 자연 속의 친근한 사물들은 시인의 시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봄날에는 발밑을 보며 걷습니다/발밑에는 상처들이 많습니다//풀꽃이 있습니다/천명의 아이들이/그을음을/닦고 있습니다 … 풀빛 강에 마중나온/천명의 어머니들도/풀빛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그래서 발밑에서만/싹이 나옵니다.”(‘발밑을 보며 걷기)

고향이나 어머니, 유년의 기억을 회상하는 시편들도 다수 수록됐다. 한 편의 전원적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까맣게 탄 등에/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우물가에서 펌프질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 다니는/반짝이는 개미들을/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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