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도의 간결함으로 더 강렬해진 존재감에르메스가 시계를 처음 제조한 건 1912년이다. 1978년에는 스위스에 시계 전문 자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시계 산업에 뛰어들었다. 관련된 세월이 100년이 넘는다. ‘럭셔리 워치 메이커’로서 자리 잡겠다는 에르메스의 의지는 오랜 시간 꾸준히 이어져 왔다. 시계 본연의 가치를 앞세워 온 에르메스가 올해 자신 있게 선보인 남성용 시계들을 살펴봤다. 본질에 충실한 슬림 데르메스 2015년 탄생한 슬림 데르메스 라인은 극도의 간결함과 균형 잡힌 형태로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가느다란 선으로 표현된 케이스와 직각 형태의 러그, 필립 아펠로아가 디자인한 숫자는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에 섬세한 디테일을 더해준다. 플래티넘으로 제작된 새로운 GMT는 전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여행자에게 이상적인 동반자가 된다. 신비스러운 크리스털 아래쪽으로 베일에 싸인 듯 보이는 9.48mm 두께의 울트라-씬 케이스는 간결함을 더욱 극대화하고, 탁 트인 형태의 반투명 블랙 스모크 다이얼과 숫자의 선 사이에 공간을 더한 특별한 폰트는 섬세하게 마감돼 강렬한 인상을 더한다. 여러 개의 숫자가 자유로운 형태로 나열되어 있는 GMT 카운터와 6시 방향 날짜 카운터의 조합이 시선을 끈다. 가느다란 로듐 도금 바톤 핸즈가 포인트로 더해져 매뉴팩처 다이얼 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새로운 슬림 데르메스 GMT에는 2.6mm 두께의 울트라-씬 에르메스 매뉴팩처 H1950 무브먼트가 장착됐다. 그 위로 특별 개발된 1.4mm의 울트라-씬 GMT 모듈이 더해졌다. 마이크로 로터로 움직이는 메케니컬 셀프-와인딩 무브먼트가 시간, 날짜를 표시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시간과 현재 머물고 있는 여행지의 시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인디케이터를 장착했다. 견고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H08 에르메스 H08에는 긴장감과 유연성, 견고함과 섬세함이 공존한다. 대담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이 시그니처 모델은 새롭게 선보이는 강력한 블루 색감 모델과 함께 더욱 신선한 매력을 선보인다. 2021년 에르메스 시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이 탄생시킨 H08 시계는 에르메스가 고수하는 완고한 원칙과 높은 기준을 바탕으로 완성됐다. 우아하면서도 스포티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 모델은 소재가 지닌 특성과 케이스의 특별한 형태를 활용하여,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에르메스 H08 시계는 대조와 대비를 조화롭게 엮어 균형 잡힌 하나의 오브제와 같은 모습을 선보인다. 세심한 디테일과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디자인됐으며, 그래픽적 특징들이 구성 부품 곳곳에 녹아 있다. 원형 다이얼과 독창적인 타이포그래피, 부드러운 라인을 가진 케이스의 기하학적 요소들은 대담한 스타일을 더욱 강조한다. 딥 블루 티타늄 케이스에는 블랙 세라믹 베젤과 스크루 다운 크라운이 장착됐고, 다양한 질감과 마감 기법이 적용된 블루 PVD 코팅 다이얼에는 화이트 아라비아숫자와 오렌지 색상이 조화를 이룬다. 시, 분, 초를 표시하는 블랙 핸즈와 4시와 5시 방향 사이에 있는 날짜창은 에르메스 매뉴팩처 H1837 메케니컬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로 구동된다. 블랙 DLC 티타늄 버클과 블루 러버 스트랩으로 시계의 스포티한 감성을 더욱 강조했다. 역동적으로 재탄생한 시그니처 모델, 에이치 아워 매뉴팩처 무브먼트로 구동되는 강렬한 블랙의 에이치 아워는 새로운 소재와 독창적인 외관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1996년 디자이너 필립 무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에이치 아워는 어느 때보다 신선하고 역동적인 시그니처 컬렉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에이치 아워는 이번에 처음으로 에르메스 매뉴팩처 메케니컬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라지 사이즈의 정사각형 티타늄 케이스는 부분별로 마감 기법을 달리했고 딥 블랙 컬러와 그레이 톤은 아름답게 균형 잡힌 그래픽적 형태를 더욱 강조한다. 브러시드 센터와 새틴-브러시드 챕터링, 그레이 전사 아라비아숫자가 담긴 블랙 다이얼 위로 회전하는 가느다란 시침과 분침, 초침은 에르메스 매뉴팩처 H1912 셀프-와인딩 메케니컬 무브먼트로 움직인다. 하우스의 독창성과 전문성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는 케이스와 무브먼트, 다이얼, 인터체인저블 블랙 바레니아 송아지 가죽 스트랩은 모두 에르메스 시계 공방에서 직접 생산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2022-06-24 03:00 
식품-화학 산업소재 등 고도화… 독자개발 생분해 플라스틱 양산삼양그룹(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은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및 글로벌 시장 확대 가속화, 현금 흐름 관리 강화, 일하는 방식 변화’ 등 세 가지를 올해 경영 방침으로 제시했다. 원료가 상승, 경기 회복 속도 저하 등 국내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수립한 중장기 성장 전략 ‘비전(Vision) 2025’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미다. 삼양그룹의 중장기 성장전략 ‘비전 2025’는 사업 구조 고도화를 통한 스페셜티 사업과 글로벌 시장 비중 확대를 목표로 한다. 이에 따라 삼양그룹은 그룹 전반에서 △헬스 앤드 웰니스(health&wellness) 산업용 소재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용 소재 △친환경 소재 사업을 육성 중이다. 설탕, 전분당, 밀가루 등 기초식품 소재를 중심으로 하던 식품 사업은 대체감미료 ‘알룰로스’, 수용성 식이섬유 ‘난소화성말토덱스트린’ 등을 통해 스페셜티 식품 소재 리더십을 확보하고 있다. 알룰로스는 무화과, 포도 등에 들어 있는 단맛 성분으로 설탕과 비슷한 단맛을 내면서 칼로리는 ‘제로’ 수준이어서 차세대 대체감미료로 불린다. 삼양사는 2016년 자체 기술로 알룰로스 상용화에 성공하고 현재는 글로벌 홍보 활동과 거래처 및 유통 파트너십 발굴 등 글로벌 진출 기반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폴리카보네이트를 중심으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에 주력하던 화학사업은 친환경 소재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삼양그룹은 ‘이소소르비드’를 활용해 독자 개발한 생분해성 플라스틱 ‘PBIAT’ 양산에 착수했다. 이소소르비드는 옥수수 등 식물 자원에서 추출한 전분을 화학적으로 가공해 만든 바이오 소재다. 이소소르비드를 이용해 만든 플라스틱은 내구성, 내열성, 투과성이 우수해 모바일 기기와 TV 등 전자제품 외장재, 스마트폰의 액정필름, 자동차 내장재, 식품 용기, 친환경 건축자재 등에 쓰인다. 현재 삼양그룹은 전북 군산에 연산 1만 t 규모의 이소소르비드 공장 가동을 준비 중이다. 삼양패키징은 친환경 전략 실현을 위해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확대했다. 기존에 재활용 페트(PET) 플레이크를 생산하던 시화공장에 2만1000t 규모의 리사이클 페트칩 생산 설비를 새로 도입해 내년 말부터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리사이클 페트칩은 페트 플레이크보다 순도가 높아 의류용 원사, 식품 및 화장품 용기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쓰인다. 첨단산업용 소재 사업 확대를 위해 지난해 10월에는 정밀화학 기업 엔씨켐을 인수했다. 엔씨켐은 감광액(포토레지스트) 생산에 필요한 중합체(폴리머) 및 광산발생제(PAG)를 주력으로 하는 반도체용 감광액 소재 분야의 선두권 업체로 꼽힌다. 감광액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정밀 전자제품 생산 공정의 하나인 노광 공정의 핵심 소재다. 삼양그룹은 2005년 전자재료 소재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관련 소재 사업을 영위하는 삼양사 EMS BU(Business Unit)는 액정디스플레이(LCD)용 컬럼스페이서를 비롯해 디스플레이 터치패널 제조에 필요한 오버코트, 감광액 소재 중 하나인 광개시제 등을 중심으로 지속 성장 중이다. 삼양그룹은 올해 ‘수익성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 인플레이션 압력 확대, 전 세계적 공급망 불안정, 글로벌 물류난 등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 지속에 따라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해 위기에 대응할 방침이다. 김윤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운전자본 최적화, 판가 관리, 투자 효율 극대화 등 현금 흐름과 수익성을 모두 철저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2022-04-01 03:00 
생활밀착형 건강관리 플랫폼 신설… 글로벌 웰니스 시장 진출롯데 신성장 엔진이 본격화되고 있다. 롯데는 도심항공교통(UAM), 메타버스에 이어 헬스케어 사업에도 진출한다. 수소, 배터리 소재 분야에서 외부 기관 협업은 물론이고 착실히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미래 성장이 기대되는 회사를 만드는 데에는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향상 노력이 핵심”이라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투자, 사회적으로 선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롯데는 헬스케어, 바이오를 미래 먹거리로 낙점하고 지난해 8월 이를 담당하는 전담팀 신성장2팀(바이오), 신성장3팀(헬스케어)을 신설했다. 외부 전문가를 팀장으로 영입해 신사업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첫 스타트는 신성장3팀이 선보였다. 롯데지주는 10일 열린 이사회에서 700억 원을 출자해 ‘롯데헬스케어’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헬스케어 플랫폼 구축 및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롯데헬스케어는 과학적 진단, 처방, 관리 등 건강 전 영역에서 ‘내 몸을 정확히 이해하는 새로운 건강 생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유전자, 건강검진 결과 분석 등 고객의 건강 데이터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건강기능식품, 운동 등 특정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웰니스(Wellness) 전반을 다루는 버티컬 커머스 플랫폼을 지향한다. 롯데헬스케어는 헬스케어 플랫폼 사업 기반으로 국내 웰니스시장 선점 후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유전자 진단, 개인 맞춤 처방 등 영역에서 경쟁력 있는 전문기관의 외부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 및 협업도 적극 추진한다. 롯데헬스케어는 플랫폼 정착 후 개인 유전자 NFT, 웰니스 의료기기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플랫폼과 연계할 수 있는 오프라인 센터를 통한 글로벌 진출도 구상하고 있다. 롯데헬스케어는 실버타운 사업과의 협업도 검토한다. 플랫폼상의 유전자, 건강 정보에 실버타운에서 제공한 정보를 더해 입주민을 대상으로 차별화된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지주 우웅조 신성장3팀장은 “롯데헬스케어는 언제, 어디서나 고객의 건강한 삶을 위한 생활밀착형 건강관리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그룹사뿐만 아니라 외부 기관과 다양한 협업을 통해 차별화된 플랫폼 사업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롯데헬스케어 설립을 통해 그룹사 헬스케어 사업들과의 시너지도 강화한다. 현재 롯데 계열사에서는 회사의 특성과 시장의 상황을 고려해 다양한 헬스케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식품 사업군에서는 건강기능식품과 건강지향식 제품 개발에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건강기능식품 라인업 강화를 위해 자체 개발은 물론이고 투자, 업무협약 등을 통한 외부 기관과의 공동 연구 및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7월 국내 수소 수요 30%를 공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친환경 수소 성장 로드맵을 발표했다. 발표에는 2030년까지 약 4조4000억 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해 약 3조 원의 매출과 10%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실현한다는 계획도 포함했다. 현재 롯데케미칼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수소 약 23만 t 중 7만 t을 책임지고 있다. 수소유통은 수소전기차용 충전소, 수소연료화 테스트 등 대부분 미래 수소사업 분야를 망라한다. 롯데케미칼은 1월 삼성엔지니어링, 포스코와 말레이시아에서 청정 수소 사업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국내 최고의 과학 인재 양성기관인 KAIST와 함께 ‘탄소중립연구센터’를 설립하고 탄소중립사회 실현을 위해 5건의 연구도 진행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2022-04-01 03:00 
[광화문에서/박선희]‘점심값 2만 원’ 시대, 물가 잡을 묘책 있나혹자는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고 했지만, 치킨은 어쨌든 한국인의 솔푸드다. ‘치느님’ ‘치멘’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치킨 사랑은 남다르다. 하지만 이 치킨값이 이제 2만 원을 넘어섰다. 심지어 배달료는 별도다. 배달료까지 더하면 주요 프랜차이즈의 치킨 한 마리 값은 2만3000∼2만4000원을 호가한다. 안 오르는 게 없다지만, 치킨값 2만 원 시대는 생각보다 더 빨리 왔다. 최근 외식 물가는 연일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연초부터 도미노 인상 중인 주요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세트 메뉴 가격은 세트당 1만 원에 육박한다. 시장 경쟁이 치열한 특성상 원두값 인상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8년 넘게 동결돼 있었던 커피 프랜차이즈도 올해 들어선 오랜 눈치 보기를 끝내고 일제히 가격 올리기에 나섰다. 점심으로 햄버거 세트에 커피 한 잔만 마시려 해도 이제 1만 원 한 장으론 부족하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고달픈 소리가 절로 나온다. 최근의 외식 물가 인상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돼 있던 일이었다. 지난해부터 ‘파테크’ ‘금란’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농수산물 가격이 고공행진을 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작황 부진, 조류인플루엔자 여파로 인한 살처분 등이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 어려워지면서 인건비 상승분까지 더해졌다. 세계적으로도 밀, 콩, 대두, 설탕, 팜유 등 원재료값이 계속 올랐다. 팜유와 소맥분 가격은 최근 3년간 각각 176%, 52% 급등했다. 이상 기후에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공급망 불안이 겹쳐서였다. 기업들로서는 소비자 저항 때문에 누적된 가격 인상 요인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 원재료와 물류비가 다 올랐으니 제품 가격에 반영하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지난해 하반기(7∼12월)부터 가공식품 가격 인상이 본격화됐다. 밀가루, 쌀, 라면, 빵, 조미료 가격이 줄줄이 올랐다. 외식 물가가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재료비에 인건비, 임대료, 배달수수료 상승분까지 더해져 인상률이 훨씬 살벌했을 뿐이다. 소주 가격이 소매가로 100원가량 오르면, 유통 과정에서 물류비, 인건비 등이 더해진 식당에서는 1000원 넘게 오른다. 체감 물가가 심상치 않은 수준에 이르자 최근 정부는 죽, 김밥, 햄버거 등 12가지 주요 외식 품목의 프랜차이즈별 가격 등락률을 매주 공표하겠다고 발표했다. 가격 고시로 ‘눈치’를 주겠다는 것이지만, 심리적 압박으로 물가를 통제하겠다는 건 정책적 후퇴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외식 물가 인상이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별다른 준비 없이 ‘점심값 2만 원 시대’를 맞았음을 자인한 꼴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식품 가격 인플레이션 압박은 더 거세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애꿎은 곳에다 따가운 눈총 쏘는 대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내놔야 할 때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2022-03-01 03:00 
찾고 싶은 동네 만드는 젊은 소상공인들의 힘[광화문에서/박선희]‘서핑 성지’로 뜬 강원 양양군 현남면을 찾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회관 앞에 태닝한 구릿빛 몸을 가진 서퍼들이 비치타월을 걸치고 걸어 다니던 장면이었다. 이장님 안내 말씀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의 어촌마을을 미러 선글라스를 쓴 채 여유롭게 활보하는 힙스터라니. 그곳을 역동적이고 활기찬 곳으로 만든 건 돈을 쏟아부어 다시 지은 대형 건물이나 새로 깐 도로 같은 게 아니었다. 주인공은 그 힙스터들, 그러니까 콘텐츠였다. 요즘 서울에서 새롭게 뜬다는 동네들이 대체로 이런 느낌이다. 내부순환도로가 지나는 제기동 정릉 천변가에는 창문 필름이 벗겨진 기사식당과 자물쇠로 잠긴 슬레이트 창고 옆에 작고 힙한 와인바가 생겨나고 있다. 의류 도매시장으로 번성했다가 지금은 쇠락한 중구 신당동 일대, 변변한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았던 용산구 한강로동 일대에도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며 골목길 분위기를 조금씩 바꾼다. 괜찮은 감각의 가게 한둘 들어온다고 동네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낡은 다세대주택 위로 전깃줄이 엉켜 있고, 폐업한 도매점이나 철물점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이런 길 위에 불쑥 생겨난 미국식 브런치 카페나 소규모 편집숍, 독립서점은 낙후된 서울 뒷골목 풍경을 이색적으로 치환시키는 힘이 있다. 그 이질성이 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콘텐츠의 힘이다. 콘텐츠를 갖춘 젊은 소상공인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제기동, 신길동, 홍은동 같은 이름 없던 상권에 둥지를 튼 것은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불가피한 여건에서 출발했지만 제약은 도약의 출발이 됐다. 유동인구가 적고 목이 나쁘니 전문성이나 독특한 개성, 마니아를 저격하는 콘텐츠로 확실히 무장해 타깃 고객을 끌어와야 했고, 인스타그램 같은 온라인 홍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게 통했다. 본보와 한국신용데이터의 분석 결과 지난해 이런 변두리 동네 젊은 사장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서울 매출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비대면 시대 가속화된 대형 상권의 몰락과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의 취향 변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소득 수준이 높아진 현대 소비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매스 브랜드보다 세분화된 취향을 반영한 니치 마켓(틈새시장)을 좋아한다. 콘텐츠를 갖춘 소상공인은 새로운 시대에 오히려 더 경쟁력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몰리는 제주 월정리 카페거리나 양양의 서퍼비치도 처음엔 재미있는 발상과 젊은 감각을 가진 소상공인 한둘로 시작됐었다. 자발적으로 자리 잡은 소상공인들이 저마다의 스토리와 개성을 담은 작고 특별한 가게를 선보이고, 그렇게 하나둘 생긴 동네 핫플레이스가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지역’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근사한 변화가 있을까. 코로나19란 극한 여건 속에서 젊은 소상공인들이 낸 성과를 가볍게 흘려 볼 수 없는 이유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2022-01-29 03:00 
임차료 싼 변두리에 개업한 ‘MZ사장님’… SNS로 입소문내 ‘핫플’로남준영 씨(34)는 2년 전 서울 용산구의 허름한 빌라촌에 ‘생애 첫 가게’를 냈다. 가게라고는 철물점과 백반집이 전부였던 동네에 노란 차양과 야자수로 꾸민 베트남 현지식 식당이 들어섰다. 아내와 직원 한 명으로 조촐하게 시작했던 이곳은 이제 손님들이 영업 30분 전부터 줄 섰다가 문이 열리면 뛰어 들어오는 ‘오픈 런’ 명소가 됐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이 없진 않았지만 손님이 꾸준히 늘어 최근 중식당과 이자카야(일본식 주점)까지 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남 씨처럼 낡은 주택가같이 임차료가 싼 지역에 새로 자리 잡은 ‘MZ세대 사장님’들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매출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가게를 내야 한다’는 창업 공식을 깨고 새로운 곳을 탐험하려는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것과 달리 MZ 사장들은 낮은 생산성에 시달리던 국내 자영업 지형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로나19 잘 버틴 변두리 ‘MZ 사장님’23일 동아일보가 한국신용데이터와 함께 코로나19 확산 전후로 서울 시내 외식업 소상공인 매출을 분석한 결과 총 14개 동에서 신규 창업자 매출이 코로나19 발생 전보다 평균 26%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서울 시내 전체 외식업 소상공인 매출은 평균 30% 줄었다. 이는 2021년 3분기(7∼9월) 서울 시내 연 매출 10억 원 미만인 외식업 소상공인 매출을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 3분기 매출과 비교한 결과다. 한국신용데이터는 전국 자영업자 90만 명의 매출, 현금 흐름 등 사업 데이터를 관리한다. 지역별로는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창업한 외식업자 매출 상승률이 56%로 가장 높았다. 이어 ‘송리단길’로 불리며 최근 외식업자 창업이 활발했던 송파구 송파동과 낡은 철공소들이 있던 자리에 식당 카페 등이 생긴 영등포구 문래동 매출도 각각 47%, 43% 올랐다. 용산구 한강로동(39%), 동대문구 회기동(33%), 서대문구 홍은동(29%), 마포구 동교동(22%), 강남구 신사동(18%), 마포구 연남동(12%) 등의 매출 증가율이 높았다. 마포구 망원동(5%), 성동구 성수동(4%), 중구 신당동(―1%)도 코로나19 확산 이전 수준의 매출을 회복했다. 특히 이들 지역은 개업 시기에 따라 매출 격차가 컸다. 제기동 전체 외식업자 매출은 코로나19 이전보다 10% 줄었지만 신규 창업한 외식업자 매출이 56% 오른 게 대표적이다. 제기동 정릉천 바로 옆에서 와인바를 운영하는 박세현 씨(27)는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 월세의 4분의 1도 안 되는 싼 임차료와 아지트 같은 느낌에 꽂혀 가게를 냈다”고 했다. 그의 가게 주변엔 낡은 다세대주택과 기사식당, 자동차 정비소가 즐비하다. 그 흔한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편의점도 없지만, ‘뜻밖의 장소’라는 매력에 SNS를 보고 찾아온 손님들로 붐빈다. 강예원 한국신용데이터 데이터비즈니스 총괄은 “개업 시기에 따라 매출이 유의미하게 엇갈리는 건 낙후됐던 기존 상권에 MZ세대 자영업자들이 새로 유입된 결과”라고 풀이했다.○ 창업 공식 거꾸로 쓰는 ‘마이웨이 개업’ 이처럼 MZ 사장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임차료가 낮아 진입 장벽이 낮은 데다 노포(老鋪) 등 레트로한 분위기가 형성돼 끊임없이 이색 장소를 물색하는 소비자 취향과 맞아떨어져 인기다. 서울 중구 신당동은 한때 의류 도매시장을 중심으로 떴다가 쇠락했지만 최근 MZ 사장들이 나타나며 달라지고 있다. 노포와 낡은 빌라 사이에서 작은 와인바를 운영하는 이예슬 씨(29)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동네인 데다 임차료가 낮아 선택했다”며 “SNS를 보고 온 젊은층뿐만 아니라 40, 50대 동네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힙플레이스로 떠오른 한강로동 브런치 가게 주변엔 사람 한두 명이 겨우 다니는 다세대주택들뿐이지만 이 일대 카페나 와인바는 손님들이 영하의 날씨에도 밖에서 1시간째 순번을 기다리기도 한다. 2019년 이곳에 7평짜리 카페를 낸 이선행 씨(31)는 “월세가 가로수길의 3분의 2 수준”이라며 “최근 근처에 생긴 매장 대부분은 또래가 운영한다”고 전했다. 이승일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임차료 부담을 덜고자 일부러 낙후된 골목에 개업하는 MZ 사장들이 많아졌다”며 “유동인구가 적은 상권에서도 자신만의 콘텐츠와 디지털 역량을 갖춘 젊은 사장들이 코로나 타격을 비켜 나갔다”고 했다. 박대원 상가정보연구소장은 “‘목 좋은’ 상권에 가야 장사가 잘된다는 기존 통념과 달리 최근엔 입지가 달리는 지역에서 젊은층의 이색 브랜드가 성공하는 사례가 늘었다”며 “젊은 자영업자들이 신흥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좋아서 하는 일” 생계형 자영업자와 달라 MZ 사장들은 자신만의 이야기와 개성을 담아 전문성을 살리고 자신의 적성을 창업 아이템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생계형 자영업자들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2020년 샐러드 가게를 창업한 김광석 씨(35)는 조리고등학교와 조리 관련 대학을 거쳐 아프리카에서 KOICA 요리단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어도 못 하는데 일본에 가서 스테이크 굽는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현재 그의 가게는 프랑스식 조리법과 튀니지 음식을 활용한 드레싱을 쓴 요리로 인기 있다. MZ 사장들의 홍보는 SNS가 맡는다. 김민아 씨(31)는 재작년 친할머니가 거주하던 신길동 주택을 개조한 카페를 냈다. ‘주택가 카페’로 입소문 나며 손님들이 일부러 찾아온다. 그는 “성수동, 연남동까지 안 가도 가까운 동네에서 카페를 찾는 수요가 있다”고 전했다. 자영업은 유연한 근무를 추구하는 MZ 사장들의 가치관에도 부합한다. 실제로 통계청이 1년 이내에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창업 희망 사유를 설문한 결과 ‘하고 싶은 업종이 있어서’(27.3%),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서’(27.0%), ‘연령에 구애받지 않아서’(17.2%) 등이 꼽혔다. ‘취업이 어려워서’(13.7%)는 가장 낮았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MZ세대에게 일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 ‘역량을 활용해 돈까지 벌 수 있는 것’이란 개념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최근 KB국민은행이 발간한 자영업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자영업자는 657만 명(2020년 기준)으로 국내 경제활동인구의 24.4%를 차지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여섯 번째로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 김진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생계형 자영업’의 폐업률이 높아지면서 MZ 사장을 중심으로 자영업이 세대교체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자영업 시장도 이젠 자신만의 콘텐츠를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자기 취향이 확고한 새로운 소비자를 겨냥해 독특한 브랜딩과 콘텐츠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뜨는 MZ사장님 모셔라”, 백화점들 ‘핫플’ 유치경쟁 “트렌드 최첨단… 고객에 이색경험”서울 서초구 방배동 주택가에서 수제 제과점을 운영하는 박소희 씨(33)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도 매장을 거느린 사업가가 됐다. 2019년 2000만 원을 대출 받아 시작한 그의 가게는 ‘이색 디저트’로 유명해지자 지난해 백화점 입점 제의를 받았다. MZ세대 사장님들은 백화점 등 유통 대기업들이 신규 점포를 낼 때 구애 1순위로 떠올랐다. 트렌드의 최첨단에 선 이들을 유치해 이색 경험을 원하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 지난해 7년 만에 신규 점포를 낸 롯데백화점은 MZ 사장 가게를 유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디저트 가게 ‘파롤앤랑그’, 서울 성동구 성수동 미술공방 ‘성수미술관’ 등 대부분 MZ 사장이 운영하는 곳들이다. 백화점들은 직원 20여 명이 팀을 꾸려 소위 ‘뜨는 동네’를 매일 찾아다니면서 MZ 사장님들을 발굴하기도 한다. 김현우 현대백화점 바이어는 “지역의 골목상권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게 중요해졌다”며 “잘되는 MZ 사장 가게는 실력은 기본이고 트렌디하다”고 했다. 백화점은 대중적이라며 입점을 거부하는 콧대 높은 MZ 사장도 적지 않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MZ 사장들의 힙한 가게는 흔하지 않아 인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MZ 사장들이 백화점을 무조건 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2022-01-24 03:00 
[광화문에서/박선희]인사철 젊은 임원 전성시대, 유행 넘은 ‘진짜 혁신’ 되길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대기업에서 1980년대생 최연소 임원을 발탁했다는 뉴스가 종일 화제가 됐던 때가 있었다. 또래 직장인 단체 대화방도 충격으로 떠들썩했었다. “일은 아랫것들이, 광(光) 파는 건 임원들이 하는 것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 연차에 벌써 광을 팔고 다닌 건가” “퇴짜 맞은 임원 신년사 고치고 있던 내 손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같은 반응이 쏟아졌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올해 말도 주요 기업들이 줄지어 인사를 단행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충격적이었던 젊은 임원이나 독한 세대교체는 올해 들어서는 혁신 인사의 필수 코드가 됐다. 기업들의 선택은 점점 더 과감해지고 있다. 네이버에서는 81년생 여성 대표이사가 탄생했다. 사장단을 모두 교체한 대대적 인사를 감행한 삼성은 30대 임원과 40대 부사장을 대거 발탁했다. SK그룹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40대 사장을 임명했고, LG그룹 인사에서도 신규 임원 중 40대가 62%를 차지했다. 기업들이 젊은 임원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는 연공서열 타파, 조직문화 쇄신, 차세대 성장 동력 마련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주요 대기업의 3∼4세 경영이 본격화되면서 ‘젊은 오너’에 맞춰 임원 연령대가 전반적으로 하향 조정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30대 임원, 40대 사장단’은 부인할 수 없는 조류가 됐다. ‘최연소’ 타이틀 하나쯤 없이 발표되는 인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국내 기업들은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다. 화제가 되는 좋은 사례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다. 한때 팀제 전환이나 식스시그마 도입이 유행했던 것처럼 얼마 전까지 다들 수평적 조직문화와 애자일 경영기법을 적용한다고 바빴다. 요즘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이 대세다. 조직문화를 쇄신하고 MZ세대와의 소통에서 가교 역할을 할 젊은 임원을 두는 것 역시 크게는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연령대를 파격적으로 낮추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한 참신한 포석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인사 그 자체가 유연한 기업 문화나 혁신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어떤 베스트 프랙티스도 일률적으로 적용할 땐 효과가 없다. 보여 주기나 흉내 내기에 그친다면 더 그렇다. IT업계에서 ‘귤화위지(橘化爲枳·귤이 탱자가 된다)’란 말에 빗대 “실리콘밸리의 귤이 판교에 오면 탱자가 된다”는 자조가 떠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현실에 맞는 정교한 적용이 있어야 효과를 본다. 인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임원을 기용한 기업들은 저마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잡음이 불거졌던 곳도, 급변한 글로벌 환경에 맞춘 도약이 필요한 곳도 있다. 인사로 표출된 쇄신에 대한 갈망을 이들이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연말에 연이어 전해지는 ‘젊은 인사’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우리 기업들의 ‘진짜 혁신’으로 거듭나기를 바라 본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2021-12-13 03:00 
실수하고 서툴러도 괜찮아!…어리바리 ‘인턴기자 신드롬’ [광화문에서/박선희]“다음 중 휴가 때 보고 싶은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 vs 아수라.” 최근 쿠팡플레이 코미디프로인 SNL코리아에 출연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받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다시피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배우 김부선이 출연했고 ‘아수라’엔 대장동을 연상시키는 소장동 개발 비리가 등장한다. 눈을 땡그랗게 뜨고 질문을 던진 진행자는 인턴기자 주현영. 요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인턴이다. 정치인 인터뷰 코너인 ‘주 기자가 간다’는 줄곧 화제였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에겐 “저에게 막말 또는 화내실 예정인지 먼저 여쭤보고 싶다”고 질문했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교과서 같은 답변엔 “너무 좀 재미없다…”고 말끝을 흐리며 디스했다. 정치 논리를 떠나 “웃긴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 한편, “주 기자 언제 이렇게 성장했냐”는 감탄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주 기자는 SNL코리아의 한 콩트 속에서 어리바리한 20대 인턴기자 역을 사실적으로 소화해 유명해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발성으로 여유 있는 척하다 매번 기본적인 답변도 제대로 못 하며 급격히 무너졌는데, 그 연기가 요즘 젊은 세대 특징을 실감나게 재현했단 평을 받았다. 모르는 걸 물으면 “제가 정한 게 아니다 보니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부분들? 그런 사실의 관계? 일단 그런 게 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둘러댔고, 그래도 수습이 안 되면 “나하고 안 맞는 것 같다”고 울먹이다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첫 등장 영상은 600만 회 조회됐고, 상황에 맞지 않게 즐겨 쓰는 “일단은 좋은 질문? 지적? 감사합니다”란 말은 유행어가 됐다. 어리바리 신입이란 점에선 ‘미생’의 장그래와 비슷했지만, 장그래는 한없이 선하고 진중하며 무엇보다 너무 잘생겼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졌다. 주 기자는 훨씬 리얼했다. 한때 여성과 사회 초년생을 무능력 프레임 안에 가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의욕은 있으되 밑천이 없어 헤맸던 기억, 있어 보이려 애쓸수록 없어 보였던 경험은 성별과 세대를 초월해 모두에게 있다. 요즘 대중문화의 새로운 조류 중 하나는 이런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다. 특히 ‘찌질한’ 일상의 굴욕을 사실적으로 해부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쓴 장류진 작가도 스크럼(실리콘밸리식 스탠딩 회의)을 아침 조회로 전락시키는 스타트업 대표나 오너에게 찍혀 카드 포인트로 월급을 받는 직장인 등 정보기술(IT) 업계 세태를 밀착 묘사한 ‘판교 리얼리즘’으로 유명해졌다. 미화의 필터 없이 일상의 디테일을 그대로 살린 콘텐츠로부터 폭소와 공감, 위안을 얻는 이들이 많아졌단 뜻이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블롬크비스트 같은 특종 기자도, 펭수 같은 어록 제조기도 아니건만, 덕분에 이 어리숙한 인턴기자는 대세가 됐다. 현실이 팍팍해선지 미숙하던 캐릭터의 성장이 주는 대리만족도 컸다. 이 후보 편을 마지막으로 1시즌은 끝났지만, 모처럼 괜찮은 정치풍자와 실시간 성장 스토리를 동시에 지켜보는 즐거움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2021-11-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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