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 할아버지 목소리 들으며 뭉클, 그에게 동아일보는…”

박선영 CBS PD(고 박재표 순경 손녀) 입력 2020-06-11 10:36수정 2020-06-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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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로파간다 프레스 홈페이지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인연'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이에 동아일보는 1956년 경찰의 표 바꿔치기를 고발했던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제보자 박재표 씨(1932~2017)의 유족들을 5월 20일 찾아뵈었습니다. 행사에 참석했던 박 씨의 손녀 박선영 CBS PD가 행사 후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박 PD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일어났던 부정투표의 역사를 일러스트와 함께 도감 형식으로 소개한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이란 책이 있다. 얼마 전 동생이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책 첫머리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양심선언의 계보에서 ‘조상’과 같은 인물”이라고 기술돼 있다.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의 인생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고 박재표 순경의 부정투표 고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인의 아들 박해진 씨, 손녀 박선영 CBS PD, 부인 김선월 씨와 동아일보 박제균 논설주간, 장원재, 박훈상 기자(오른쪽부터) 천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같이 살면서도 할아버지 본인이 부정선거 고발 사건에 대한 회고를 직접적으로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집에 스크랩된 자료를 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할아버지가 관련된 사건을 조금씩 알아갔다. 할아버지에 대한 내 추억이 다소 소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천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할아버지는 내게 동아일보 자재부장 시절을 얘기하며 “정말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셨다. “동료들이 휴가를 간다고 하면 대신 근무를 자진해서 해줬다”고도 했다. 동생에겐 “동아일보 덕에 평생 월급쟁이로 살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회사에 성실하게 다니라”고 당부했다. “새벽에 동아일보 오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낙”이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난다. 거실에 있는 동아일보 50주년 기념 거울이나 동아일보 관련 자료들을 이따금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시기도 했다.


관련기사: “부정선거 고발 48년전 남편 목소리에 울컥”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521/101147895/1)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보낸 박선영 CBS PD(오른쪽) 천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동아일보에서 48년 전 동아방송(DBS) 자료를 찾아서 전해 주신 할아버지 육성을 들으며 가장 놀랐던 것은 목소리에 묻어있던 소박함이었다. 자신의 고발이 기사화된 후 기분에 대해 묻자 “이제 고민은 없고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고 담백하게 말하는 대목에서 할아버지의 순정이 느껴져 뭉클했다.

평생 일터인 동아일보에 대한 할아버지의 소박한 충성심이 민주주의, 정의, 양심과 같은 추상적이고 거대한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대의를 위해 미사여구를 동원하거나 아는 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단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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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퇴직 후 과거는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둔 채 성정 그대로 하루하루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나갔다. 매일 신문을 챙기고, 텃밭을 일구고, 밤에는 고구마순 줄기를 다듬으며 드라마를 보셨다.

천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동아일보 100주년을 맞아 우리 가족도 할아버지의 성정과 성실이 우리 사회에 작게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 백주년을 맞아 허례허식을 뒤로 하고 동아일보에 새겨진 역사적 순간을 되돌아보며 그 인물들을 기억하는 작업을 했다는 점은 박재표의 손녀로서, 그리고 같은 언론 종사자로서 의미가 깊다고 느꼈다.

언론사에 입사 후 일하며 갈수록 세상을 선해(善解)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좌절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시골 순경 박재표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들고 언론사를 찾았을 때,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 갈수록 언론사의 경영 환경이 어려워지고, 동시에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공고해지는 와중에 누군가의 순정을 왜곡 없이 듣고 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느낀다. 동아일보가 박재표 순경의 고백을 기록하고 기억한 것처럼 오늘날의 동아일보도 누군가의 고백을 기록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박선영 CBS PD(고 박재표 순경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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