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할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이수미(46). 그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연극인이다. 명동예술극장에서 22일 국내 초연을 앞둔 그는 매일 8시간 이상 연습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대본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새벽 3∼4시가 되어야 잠이 든다.
20년 넘게 무대에서 갖가지 배역을 맡아 온 그는 주변 친구들로부터 “왜 넌 무대에 올라왔다가 금세 또 사라지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선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키는 핵심 배역이다. 그는 “‘자기 앞의 생’ 제의를 받았을 때 국내 초연이라는 부담감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은 덥석 붙잡았다”며 “제가 맡은 역할이 크든 작든 무대 위에선 모든 게 다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그가 연기할 로자 할머니는 극 중 창녀 출신에 폴란드에서 온 이민자다. 또 유대인인 데다 파리 빈민가에 살며 소수자로 낙인이 찍힌 존재다. 살면서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있지만, 어린 아랍인 소년 모모와 다른 소수자들의 아픔까지도 어루만지는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로자에게서 자본주의 사회 속 연극인으로 소외된 채 지내 온 나 자신을 발견했다”며 “관객도 세대,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로자라는 한 인간과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품이 없는 휴식기에도 국내외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저 다음 배역을 맡기까지 집에 틀어박혀 연기 연습을 하거나 무대에 활용할 소재를 찾는 게 진정한 ‘꿀 휴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맡기 전에도 책과 TV를 보며 연기에 활용할 것들을 찾는 게 정말 재밌었다”고 털어놨다. 요즘엔 주로 다큐멘터리를 골라 보며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길 즐기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올해 1월 제55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수상은 다시금 무대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는 촉매제가 됐다. 늘 동료들을 축하해주기만 하고 아쉬움을 묻어둬야 했던 그는 “상을 목표로 연기했던 건 아니지만, 순수예술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는 것 같아 행복했다”는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최근 수상 이후엔 처음 무대에 올랐던 순간도 자주 떠올린다.
“20년 전엔 연극한다고 하면 ‘우와! 연극하세요?’라며 신기해했는데, 요즘엔 ‘아이고, 연극해? 너도 힘들겠다’는 동정 어린 대답을 들어요. 근데 전 요즘 같은 반응을 들을 때가 더 좋아요. 관객과 배우라는 게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 대 인간으로 객석과 무대에서 만날 때 서로의 모습에 더 쉽게 공감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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