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한상진]유권자가 이끄는 정치 혁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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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적대적 공존’, 국민분열에 앞장
신당, 욕심 비우고 침묵하는 다수의 혁신 열망 담아야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국민을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편 갈라 놓고 한쪽을 대변하는 집권전략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서로 돕는 적대적 공생의 양당 체제하에서 총선을 앞두고 양당 지도부가 민생과는 별 상관없는 공천 규칙을 놓고 티격태격 싸우면서 타협하는 진풍경이 노출되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런 신기한 풍경에 침묵하는 다수 국민은 무슨 생각을 할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미셸 푸코를 연상시키는 이 말을 양당 수뇌부에게 전하고 싶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핵심은 조직화된 세력의 등에 올라타 흥정을 하거나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상식을 갖춘 침묵하는 다수, 침묵하기에 들리지 않지만 높은 불만 속에 현실을 주시하는 풀뿌리 대중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나는 베이징(北京)대의 초빙교수로 수년간 강의하면서 이런 눈으로 동북아의 사회변동을 보고 있다. 전후 체제를 청산하려는 중국의 용틀임은 자신감을 반영한다. 중국은 이제 자신의 눈으로 세계질서를 창조하려고 한다. 정치적 리더십이 견고하고 능란하다. 일본 열도도 뜨겁다. 55년 체제의 청산과 국가 자존심 회복을 아베 신조 총리가 선두 지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용틀임은 상실감, 박탈감을 표현한다. 때문에 불안정하다.

일본의 식자층은 한국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양대 정당이 팽팽하게 경쟁한다. 시민사회도 활성화되어 있다. 수평적 정권교체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지식정보 혁명, 뉴미디어의 발전으로 여론시장도 균형을 찾았다. 이런 모습들은 상당히 서구적이다. 비서구권 어디에서도 이런 발전의 에너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그렇다. 한국은 유망한 나라다. 양대 정당이 실용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정책정당으로 발전한다면 한국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꿈은 지난 10여 년간 산산이 부서졌다. 양대 정당은 국민 분열에 앞장섰고 그러는 사이 중산층은 위축되고 국민 다수의 삶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적대적 공존의 분열적 양당 정치가 국민의 공적 제1호로 떠오른 상태다.

그럼에도 양당 체제는 끄떡없다. 왜 그럴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권자의 발목에 족쇄가 채여 있기 때문이다. 묻지마 투표를 했던 유권자들은 정당이 싫어도 갈 데가 없다. 속박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 싶어도 체질화된 양대 진영의 눈으로 보면, 우리 편에 손해가 되고 상대편에 이득이 되는 일까지 차마 할 수 있겠느냐는 미묘하고 강력한 제어장치가 집합 심리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막강한 집합 심리가 오늘날 예전처럼 견고하지 않다. 특히 호남은 역사적으로 자유와 해방의 꿈이 강한 곳이다. 이 꿈은 당장은 민주당 60년의 전통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제1야당을 겨냥하고 있다. 당의 병든 체질,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일을 한사코 거부하는 제1야당의 패권 세력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작용한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자는 유권자의 각성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합리적 보수를 향한 여권 안의 변화 열망, 실용적 진보를 향한 야권의 변화 몸부림은 지역, 세대, 계급을 넘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적대적 공존의 한 축이 무너지면 다른 축도 무너지기 쉽다. 그러면 정치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때문에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철학으로 한 축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위험이 따른다. 당장 손해를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떳떳하게 정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욕심을 비우는 낮은 자세로 유권자가 자유인의 깃발을 내걸고 새로운 미래를 열자고 호소한다면, 이런 자기반성과 혁신에 담긴 도전적 호소력이 침묵하는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신당은 모름지기 유권자가 이끄는 정치 혁신의 도구이자 그릇으로 발전해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를 우군으로 삼아 적대적 공존의 잘못된 체질을 극복하는 확실한 비전과 민생 정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첫 강의를 마치고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상상력을 펴본다.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 유권자가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되기를 선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잘 새겨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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