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병일]한국 정부는 국익 위해 얼굴 붉힐 수 있나?

  • 동아일보

朴정부 유라시아 구상과 맞고 경제 위기 돌파구가 될 AIIB
美 눈치에 선제적 선택 못하고 뒤늦게 끌려가듯 참가로 가닥
명분 쌓으려다 실리만 손해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도 얼굴 붉혀야 할 땐 붉혀야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좌고우면, 노심초사 끝에 한국정부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 AIIB 창립국으로 참가할 수 있는 3월 말 시한이 임박해서야 내려질 결정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끝까지 고민했다는 명분을 쌓으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나치게 끌려간다는 인식은 커졌고, 더 확보할 수 있었던 실익은 날아갔다.

지난해 7월 서울 한중 정상회의에 시진핑 주석은 AIIB 가입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연내 타결 요구를 들고 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 FTA에는 화답했지만, AIIB에는 대답을 주저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를 반대하는 미국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었다. 설령 미국의 그런 요구가 있었더라도 한국 정부는 이때 전향적인 의지를 표명했어야 했다. 그간 공들여온 동북아지역 인프라 개발 구상과 맞아떨어지고, 박근혜 정부가 내건 유라시아 구상과도 맞고, 저성장 고착화 한국 경제의 위기 돌파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AIIB 구상은 도로, 철도, 항만, 공항, 통신, 전력 등 아시아지역 인프라 투자수요에 비해 자금 공급이 부족하다는 간단한 계산에서 출발한다.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있긴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AIIB가 출범한다면 아시아지역의 인프라 개선에는 분명히 청신호가 켜진다. 미국은 중국이 최대 지분을 가지고 AIIB를 좌지우지하게 되면 그들이 주도해 온 국제경제 질서가 흔들린다고 판단했다. 독재국가, 비민주적인 국가들이 중국발 태풍권으로 들어가는 사태를 차단하고 싶어 했다. AIIB에 국제사회 기준에 맞는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미국의 동맹국들에는 AIIB 불참을 압박하게 된 배경이다.

중국의 AIIB 구상은 어찌 보면 미국이 키워준 셈이다. 세계은행과 ADB는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 경제력에 걸맞은 영향력을 주는 것에 인색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탄생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서방이 주도해온 국제금융기구의 지배구조 개선에 합의했지만 미국 의회는 몇 년째 그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7년 외환위기의 불길이 아시아 전역을 활활 태우고 있을 때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설립하자는 일본의 제안은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다급한 불을 끄러 온 소방수인 IMF가 불난 집 앞에서 체중 줄이고 기상시간 앞당기는 건전생활 약속 없이는 불을 끄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 약속이 지켜지는지 수시로 확인하겠다는 문서에 집주인이 서명할 때까지 불타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음에 화가 난 주인들이 만들어 보자고 했던 것이 AMF였는데 말이다.

팽팽할 것 같던 미국과 중국의 기 싸움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이 AIIB 참여를 전격 선언하면서 급격하게 중국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서방국가 들이 연이어 참가를 선언했고 아시아지역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호주도 가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만약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중심의 국제경제 질서에 비판의식을 가진 중국이 AIIB의 지분출자, 의사결정구조, 사무국 운영 등 지배구조를 그들 입맛대로 요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어머니의 가혹한 시집살이에 휘둘리던 며느리가 나중에 자신 역시 똑같이 시어머니 노릇을 하려 드는 격이다. 중국이 스스로 신형 경제대국으로 부르는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택은 중국이 지금까지 짜놓은 판에 막판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선제적이고 전략적이었어야 했다. AIIB의 사무국을 중국이 아닌 한국에 유치한다는 협상카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고 중국 역시 일방적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줄이고,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 확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신의 한 수’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AIIB가 한중 FTA와 한국의 경제외교 청사진에서 연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가장 가까운 동맹국과도 때론 얼굴을 붉힐 수 있어야 한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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