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재열]국민은 공정한 조세를 원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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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슬그머니 세금을 올리려다 ‘중산층의 분노’를 야기해 며칠 만에 항복한 경제통 참모들은 보기에 딱하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형용모순을 정책으로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꾼 2013년 8월 세제개편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조원동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세금을 걷는 것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이번에는 안종범 경제수석이 나서 “매달 세금을 많이 뗀 후 환급을 많이 받는 형식에서 조금 떼고 조금 받는 형식으로 바뀐 데서 오는 착시현상”이라고 둘러댔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결국 정부는 공제 대상을 다시 확대하고 지난해 것까지 소급 적용해 환급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언제 복지를 이야기했느냐는 듯 돌팔매질을 했지만 증세를 말하는 책임 있는 정치인은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솔직했어야 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선거용 공약이었다고. 국민을 설득했어야 했다. 다음 세대에 재정 부담을 떠넘기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복지라도 만들어가려면 사정이 나은 이들부터 앞장서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객관적 수치로 한국의 복지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거의 꼴찌다. 2013년 기준 복지지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9.8%에 불과해 OECD 평균 22.1%에 한참 뒤진다. 하지만 증가 속도는 눈부시다. 빠른 고령화와 증가하는 사회적 위험 때문이다. 올 예산 376조 원 중 복지예산은 115조5000억 원으로 사상 처음 30%를 넘었다. 예산증가분 20조2000억 원의 거의 절반도 복지에 지출된다. 그런데 4년 연속 세수는 적자다. 불경기로 인해 법인세 수입이 계속 줄고 있는 것이다.

‘공짜 복지’는 자기 땅에서 퍼낸 기름을 팔아 전 국민에게 의료와 대학교육까지 선심 쓰는 인구 40만 명의 산유국 브루나이 국왕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복지 확대를 주장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부자와 대기업에서 세금을 더 거두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쓰겠다고 했다. 이게 정상이다.

증세 없는 무상 복지를 20년 가까이 지속한 일본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정권을 잃을까 두려워 증세 논의를 기피해온 정치인들 탓에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GDP의 2.5배에 이른다. 국가신용등급은 체코 수준으로 추락했다.

복지 선진국들은 지금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훨씬 낮았을 때 이미 높은 수준의 복지 역량을 갖추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돌파 시점은 우리보다 독일이 20년, 스웨덴이 30년가량 앞서지만 당시 공적 지출 규모는 지금 우리보다 독일은 3배, 스웨덴은 4배 많았다.

이 나라들이 공공지출을 늘릴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한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있었다. 소득의 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중산층의 조세저항이 없는 이유도 소득 재분배가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고 복지가 자신들의 생애과정에서 부닥치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비한 안전망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 연말정산 파동을 불러온 것은 과세 불공정과 비효율적 복지지출에 대한 중산층의 분노다. 국민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외제차를 타는 고소득 자영업자가 많은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건강보험료 줄이기나 탈세 노하우가 얼마나 중요한 사업수완이 되는지를, 복지전달 체계가 얼마나 엉성한가를, 그리고 자신들의 유리지갑이 얼마나 손쉬운 증세의 표적인가를.

2011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조세 불공정이 사법이나 취업, 교육기회 등 다른 어느 분야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한국사회과학협의회에서 1990년 이후 매 5년 단위로 조사한 ‘불평등과 공정성 조사’에서도 소득과 재산형성 과정의 불공정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복지국가는 언감생심이다. 무책임한 정치를 그냥 두고 복지 지출만 늘리면 일본 꼴이 될 것이다. 설사 복지 지출을 늘린다 해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둘러싼 신뢰의 적자를 메우지 못하는 한 재정위기로 침몰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신뢰 적자의 주범인 정부와 정치를 혁신하지 않고 복지를 확대할 묘안이 무어냐고.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조세#세금#중산층#분노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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