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비자금 1조원 운반비가…” 뻔한 사기 왜 속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15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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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비자금 10억 달러(약 1조410억 원)를 해외에서 곧 들여올 건데 운반비만 조금 보태면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겠소."

충북에서 농사를 짓는 이모 씨(53·여)는 2007년 6월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난 김모 씨(64)로부터 '검은 유혹'을 받았다. 남편 없이 혼자 자녀를 키워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이던 이 씨는 그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이 씨는 농사짓던 땅까지 팔아가며 김 씨에게 4400만원을 건넸다. 김 씨는 거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이 씨가 꿈꿨던 일확천금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8월 말 김 씨를 사기 혐의로 검거했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투자하면 거액을 주겠다며 피해자를 현혹하는 사기범들이 최근 연이어 검거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 같은 사기 피해사례가 올 들어서만 15차례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외부에서 보기에 뻔한 사기 수법에 속는 가장 큰 것은 일확천금의 유혹 때문이다. 사기범들이 대통령 비자금을 운운하면서 투자금의 10배 이상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통에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돈을 주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제주도에서 건설업을 하는 이모 씨(44)는 2009년 100kg에 달하는 금괴를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인 20억 원에 팔겠다는 김모 씨(58)를 만났다. 20억 원을 들고 이 자리에 나간 이 씨에게 김 씨는 더 매력적인 제안을 내놨다. 자신을 미국 정보기관 요원이라 밝힌 그는 "판매하려는 금괴는 한국 전직 대통령의 것인데 해외에서 가지고 오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운반비를 투자하면 원금의 10배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씨는 금괴 5개와 현금 1억 원을 줬다. 하지만 이는 사기였다. 김 씨는 올해 8월 서울 송파경찰서에 검거됐다. 이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외제차를 끌고 나온 바람잡이가 옆에서 부추기고, 전직 대통령의 측근 이름까지 줄줄 읊어대는 통에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허경미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기꾼의 말이 허황된 걸 알면서도 한탕을 하려는 심리가 있어 돈을 건네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퍼진 배금주의가 연이어 벌어지는 비자금 사칭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대통령도 아닌 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비자금 수십억 원이 담긴 가방이 언론 등에 계속 보도된 바 있다"며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엄청난 액수의 검은 돈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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