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합의실 문지방 닳게 해야”… 최고법원 위상찾기 첫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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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의 대법원, 갈 길을 묻다]<2>언론에 첫 공개 대법원 11층 ‘전원합의실’ 보니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대법원 11층 전원합의실 내부 전경. 그림 앞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가 대법원장이 앉는
 곳이다. 판결을 선고하는 대법정에서는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일렬로 나란히 앉는 데 반해 활발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전원합의실은 
원탁에 둘러앉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대법원 제공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대법원 11층 전원합의실 내부 전경. 그림 앞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가 대법원장이 앉는 곳이다. 판결을 선고하는 대법정에서는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일렬로 나란히 앉는 데 반해 활발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전원합의실은 원탁에 둘러앉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대법원 제공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대법원에는 대법관들만 출입할 수 있는, 그것도 한 달에 한 번만 출입을 허락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전원합의실’이다. 판사들도 경외하는 곳이다 보니 서로 어디인지 알려 하지도 않으며, 외국 최고법원 재판관이 오더라도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최근 동아일보에 전원합의실 전경을 사법사상 처음으로 공개했다. 전원합의실은 대법원 11층 대법원장실 옆에 있는 113m² 크기의 방이다. 원탁테이블, 의자 13개가 있고 테이블에는 마이크가 설치돼 있다.

언뜻 보면 여느 회의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서로 다른 대한민국 구성원의 시각과 견해가 대립과 갈등하고 한데 섞이는 ‘용광로’ 같은 공간이다. 여성에게 종중원 자격을 인정해 양성 평등의 가치를 확인하고,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적법하다고 판결해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할 길을 마련한 곳도 전원합의실이다.

○ “한 해 사건 3만여 건 중 전원합의 처리는 0.06%뿐”…전원합의체 ‘실종 현상’

전원합의체는 최고 법률심으로서 국민 생활이나 기본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놓고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은 제외)이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 판결한다. “이것이 법률이다”라고 판단해 법해석에 통일성을 기하고 입법상 흠결을 법해석으로 메우기도 한다. 대법관 사이에 치열하게 이뤄진 토론은 다수의견, 소수의견, 별개의견 등으로 기록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전원합의체는 최고법원에 역할과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중요한 제도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선 활성화되지 못했다. 전원합의실의 문(門)도 통상 매달 셋째 주 목요일 한 번만 열릴 뿐이다. 전원합의체의 중요성을 강조해 ‘이용훈 코트(court·법정)’라는 미국식 별명이 붙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재임하던 2011년 17건을 처리한 정도다.

양승태 현 대법원장은 ‘전원합의를 1년에 100건 이상 하겠다’는 내부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활성화되지 못했다. 취임 직후인 2012년 전원합의체의 사건 처리 건수는 28건으로 가장 많았으나 지난해에는 22건으로 전체 처리 건수(3만5115건)의 0.06%에 불과했다. 대법원 재판은 전원합의체가 원칙인데 소부(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소재판부) 선고가 사실상 100%에 가까워 전원합의체 ‘실종 현상’이 생긴 것이다. 예외가 원칙을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소부에 시시각각 쌓여가는 사건 더미에 파묻힌 나머지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로 사건을 회부하는 데 방어적인 자세를 보이는 데 있다. 서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다른 대법관들에게 일감을 주기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사건 하나로 몇 시간 격론을 벌이는 전원합의체와 소부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는 사건 처리의 밀도와 농도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며 “소부에서 끊임없이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쟁점이 들어있을 것 같은 사건이 있어도 추가로 숙고할 시간이 없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전원합의는 필수불가결한 사안에 한정돼 열리는 상황이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없더라도 전문적인 민사사건에서 기술적 문제로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가 열릴 때가 많다. 대법관들은 여러 소부에 비슷한 사건이 있을 경우 대법관들이 쟁점과 내용을 공유한 다음 판결을 내리기도 하지만 이는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로 미국 내 극심한 흑백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한낱 성폭행 사건인 ‘미란다 사건’에서 형사사건의 절차적 정당성이 지닌 가치를 확인하며 국민 권리 보호에 앞장선 것과 크게 대비된다.

강한승 변호사는 “상고허가제로 운영되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리는 판결 수는 100건이 채 안 되지만 심리할 사건을 숙고 끝에 선정하고 판결하는 만큼 시민 권리 증진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는 판결이 나온다”며 “우리 대법원에서 전원합의를 활성화하고 영혼이 담긴 의견을 나누는 것은 현행 상고심 제도하에서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 “전원합의체 활성화해야 최고법원 위상 회복”


민법학계 권위자로 6년간 대법관 생활을 거치고 퇴임을 앞둔 양창수 대법관은 동료들에게 대법관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가장 즐겁고 인상 깊은 시간으로 전원합의를 했을 때를 꼽았다고 한다.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열리고 때로는 고성이 오가지만, 조직 구성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이런 합의체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전원합의의 과정은 쉽지 않다. 주심 대법관이 충분한 검토 끝에 사건을 전원합의체라는 ‘밥상’에 올리면 그때부터 격론이 벌어진다. 대법원장과 최후임 대법관인 조희대 대법관 사이에서도 토론이 벌어진다. 양창수 대법관과 김소영 대법관은 대학 사제지간이지만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차한성 전 대법관은 “대법원 식당에서도 토론과 설득 작업이 계속될 정도로 다수의견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을 한다”며 “수차례 전원합의를 거쳐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등 대법관 의견을 포함하려면 판결문을 최소한 10번은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없고 대법관 간 의견 일치가 된 사건이더라도 국민적 관심이 있는 사건이라면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기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들이 기업을 사금고화한 사건에서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풍부한 검토를 벌여 결론을 내린다면 국민과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가 커 건강한 기업 운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관석 jks@donga.com·신동진 기자
#대법원#전원합의실#최고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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