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남자들, 이 옷입은 여자들 참 싫어하는데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8일 03시 00분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연애 필독서로 여전히 인기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는 ‘유리를 깨고 날아가 길바닥에 떨어진’ 통굽 구두가 등장한다. 남자인 ‘나’는 ‘나의 영혼과 결합할 수 있는 완벽한 동반자’라고 믿었던 여자가 산 통굽 구두를 보는 순간, 어쩌면 이것이 잘못된 운명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뾰족한 힐 대신 앞에서 뒤까지 평평한 굽이 달린 통굽 구두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싫었기에, 통굽 구두는 남녀의 낭만적 사랑이 ‘희비극적’ 불일치로 끝나버리는 순간을 상징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대한 실감 나는 답변이긴 하나, 이 ‘절충형’ 구두를 얼마나 혐오스럽게 묘사했는지 소설의 목적 중 하나는 통굽 구두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흥미롭게도 통굽 구두처럼 대부분 여성들이 ‘머스트 해브’로 꼽는데 대부분 남성들이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패션이 있다. 최근 남성지에서 일하는 남성 기자들의 도움으로 ‘이런 옷 입은 여자들 참 싫어하는데요’의 목록을 만들어보니 역시 통굽 구두(업계용어 ‘플랫폼 슈즈’)가 최악으로 꼽혔고, 짧은 버섯머리(전문용어 ‘뱅 숏컷’), 레깅스(‘쫄바지’), 애니멀 프린트(일명 ‘호피’ 무늬), 까맣게 태운 피부(심하면 ‘마이콜’) 등이 올랐다.

즉, 남성들은 여성들의 패셔너블한 옷차림을 매우 마땅치 않게 바라보다가 언제든 트집을 잡아 구두 굽을 잘라놓거나 레깅스를 잡아 늘려 놓을지도 모른단 얘기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이런 차림의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남성들이 싫어하는 패션 아이템들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페티시즘을 배반한 공통점이 있다. 사물에서 성적 욕망을 느끼는 페티시즘은 근대 패션산업에서 매출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가 돼 왔다.

버섯머리가 발터 베냐민이 페티시즘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분석한 긴 머리카락을 제거한 상태인 것처럼 레깅스는 스타킹과, 호피 무늬는 순결한 백색과, 까만 피부는 눈처럼 흰 피부와 페티시즘 관계로 이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남성들은 “통굽 구두는 틀렸고 하이힐은 옳다”고 한다. 짧은 머리에 표범 티셔츠, 까만 레깅스를 입고 축대 같은 플랫폼 슈즈를 신은 여성을 보면 듬직한 큰누님 앞에 선 것 같다는 게 남성들의 총평이다.

패션이 여성적 매력을 거부한 걸까.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불태우고 남성들의 복식을 도입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오히려 패션에서 여성성은 강조되는 추세다. 또는 여성성이라 불리는 장식과 화려한 색, 독특한 소재 등이 남녀 구분 없이 나타난다고 할 수도 있다. 패션에서 성적 특징은 모호해지고 미학적 취향과 경제적 계층 차이가 더 뚜렷해지고 있달까.

사실 올해 여성들이 열광하는 건 어정쩡한 키높이용 통굽 구두는 전혀 아니다. 형태는 스포츠 샌들에서 따오고 화려하게 장식된 스트랩이 맨발을 강조하는 새로운 플랫폼 샌들이다. 올해의 스포티즘 룩과 어울리는 미학적 완성도와 또 다른 페티시즘을 보여준다. 레깅스 등도 비슷한 분석이 가능하다.

알랭 드 보통이 신상 플랫폼 샌들을 본다면 현대적인 여성의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패션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긴장 관계에서 새롭게 창조되기 때문이다. 패션이 순전히 자기만족적 표현이고 유행이 그저 우연이라면 이 모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P.S. 여성동아 7월호에서 여성들의 옷차림에 대한 남성들의 불평을 직접 들어보시라!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여성#패션#통굽 구두#페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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