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장
“1876년 시마네현 현령 부임 사토… 내무성 독도 편입 시도 총체 지휘”
‘反정한론 현실파’ 노력에 결국 무산
26일 독도 학술회의서 논문 발표
1877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일본 태정관 지령에 도장을 찍은 이와쿠라 도모미(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가 쪽 5대 조부인 사토 노부히로로, 그는 독도 영토 편입을 시도한 시마네현 현령이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다부세(田布施) 향토박물관 전시 사진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블로그(yamaguchiarukiyotei.blogspot.com) 화면 캡처
1876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려 시도했던 일본 시마네현의 현령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寛·1816∼1900)가 아베 신조(安倍晋三·1954∼2022) 전 일본 총리의 외가 쪽 5대 조부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토는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에게 병학(兵學)을 전수한 인물로, 일본 팽창주의의 깊은 뿌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은 발표 예정인 논문 ‘1877년 태정관지령 제233호와 그 인물들’에서 “아베 전 총리의 국가관과 사상은 어머니 아베 요코(安倍洋子)의 고조부인 사토로부터 시작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 “사토, 독도 편입 시도 총체 지휘”
근대적 지적(地籍) 편찬을 추진하던 일본 내무성은 1876년 10월 시마네현에 죽도(竹島·울릉도)에 대한 기록이나 고지도를 조사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고, 시마네현은 울릉도와 독도의 지적 편찬에 관한 질의서를 내무성에 보냈다. 과거 돗토리번의 상인이 막부의 허가를 받아 죽도를 개척했다면서, 죽도와 또 하나의 섬(外一島)을 시마네현의 관할에 포함해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섬’이 독도다.
형식은 ‘질의’지만 근대 일본이 처음으로 독도를 편입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사건이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뿌리가 깊다.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인 요시다는 나중에 혁명의 핵심 인물이 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1833∼1877)에게 1858년 보낸 편지에 “우리 번(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이 조선 만주를 지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조선, 만주를 지배하려면 죽도(울릉도)는 제일의 대기실”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 질의서 발송 당시 시마네현 현령이 그해 4월 임명된 사토였다. 난(亂)을 진압하기 위해 현청을 비운 상태여서, 질의서는 대리 참사 사카이 지로(境二郞·1836∼1900)가 보냈다. 김 소장은 논문에서 “울릉도와 독도 편입 시도의 ‘몸통’은 사카이였지만 명분과 전략을 구상하고 총체적으로 지휘한 ‘머리’는 사토였다”며 “사토는 ‘정한론의 심장’으로 불리는 요시다와도 닿아 있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조슈번 출신의 무사인 사토는 1852년 ‘병요록(兵要錄)’을 요시다에게 전수하는 등 그의 스승이자 조력자로 활동했으며, 1862∼1864년 조슈번의 해안 방어를 총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흐르는 동안 사토의 팽창주의는 후손으로 이어졌다. ‘A급 전범’ 혐의로 구속됐다가 나중에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가 사토의 증손자다. 기시의 외손이 일본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명기시키는 등 도발을 되풀이했으며, 현대 일본 강경 보수파의 상징이 된 아베 전 총리다. 아베 집안의 이 같은 내력에 대해선 기존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사토가 독도를 편입하려 했던 시마네현 현령과 동일 인물이라는 건 적어도 국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영토 진실 직시한 이와쿠라의 용기”
하지만 시마네현의 ‘질의’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조선과의 외교 문서를 5개월간 면밀히 조사한 뒤 1877년 3월 태정관(太政官·과거 일본 최고 국가기관)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공식 선언하는 ‘지령’을 내렸다. 이 ‘태정관 지령’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핵심 사료 가운데 하나다.
김 소장에 따르면 내무성에서 최종 문서 작성을 주도한 인물은 근대 우편 제도 창설을 추진한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1835∼1919) 차관보였다. “죽도와 송도(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담은 문서를 상신한 것이다. 태정관 지령에 도장을 찍어 해당 문서가 일본 정부의 공식 결정임을 드러낸 대표적 인물 중 하나는 ‘이와쿠라 사절단’(1871년)으로도 잘 알려진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巖倉具視·1825∼1883)였다. 이와쿠라는 무력에 기반한 정한론을 배격하고, 국가의 내실을 우선시했던 현실적인 정략가였다. 김 소장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아베 가문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아닌 역사 앞에 겸허했던 이와쿠라의 길을 선택해 미래로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논문은 시마네현이 22일 개최한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의 날’ 행사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이 26일 여는 학술회의 ‘역사적 문헌으로 본 독도’에서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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