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석 씨(37·인천 서구)는 5년 전 백혈병 완치 판정을 받았다.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어 피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지만 박 씨는 요즘 병원 다니는 것을 자꾸 미루고 있다. 지난해 10월 농사를 짓는 부모의 땅값이 오르면서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기초생활보장급여와 의료급여 혜택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의료급여를 받을 때는 검사와 진료에 5000원이면 가능했지만 지금은 3만5000원이 훌쩍 넘는다. 박 씨는 “생명이 달린 일에 고작 몇만 원을 아낀다고 생각할 테지만 월급을 타도 통장에 병원비가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혼 13년째인 그는 세 딸의 아빠. 월소득 100만 원이고 아내가 희망근로를 해 60만 원을 보태왔다. 66m²(20평) 임대아파트 월세 14만 원을 내고 공공요금 학비를 내면 말 그대로 ‘근근이’ 먹고 산다. 수급권자일 때 모두 무료였던 수도료 전기료 통신료 TV수신료도 내야 한다.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돈을 모을 수 없었다.
박 씨는 “아내의 희망근로기간이 끝나면서 생활비가 모자라 카드대출 100만 원을 받았는데 갚을 일이 걱정”이라며 “300만 원 이상 벌지 않으면 차라리 수급권자인 편이 낫다”고 말했다.
박 씨는 항암치료를 받았던 1년 외에는 일을 쉰 적이 없었지만 늘 가난했다. 최저생계비를 조금 넘는 수입으로는 의료비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고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박 씨는 그저 백혈병이 재발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일하는 차상위계층, 복지에서 소외
노인 장애인같이 근로능력이 없어 가난한 이들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된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은 ‘복지’ 대상자가 아니었다. 일을 하는 사람보다 안 하는 사람이 복지 혜택을 많이 받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일을 하지만 빈곤선에서 맴도는 근로빈곤층은 348만 명(2009년 기준)이다. 이들은 의료급여 교육급여 같은 공적부조에서도, 국민연금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 혜택에서도 빠진 사각지대에 있다.
현재 기초수급자 자격이 박탈되면 생계급여뿐 아니라 주거 의료 교육 해산 장제 자활 등 7개 급여가 끊긴다. 기초수급자에겐 매달 114만1026원(4인 가족 기준)이 현금으로 지급된다. 의료비는 거의 무료다. 중고교생 자녀는 학비 급식비 교과서비, 대학등록금과 수업료도 지원받는다. 영구임대 전세임대 주택 입주자격을 갖는다. 여기에 각종 공과금과 세금이 면제된다.
최저생계비보다 1만 원이라도 더 벌면 이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전부 아니면 전무’로 지원하다 보니 한 번 기초수급자가 되면 웬만해선 탈(脫)수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기초수급자에서 벗어나도 다른 혜택을 한꺼번에 줄이지 말고 점진적으로 줄여갈 것을 제안한다.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나 영세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사회보험 혜택도 받기 힘들다. 정규직이라면 고용보험 혜택을, 수급권자라면 자활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근로빈곤층 중 국민연금 가입 가구는 12.1%, 고용보험 산재보험 가입률도 각각 6%와 7.2%에 그친다. 보험료를 지원하는 건강보험만 가입률이 73.2%다. 실직 질병 같은 갑작스러운 위험이 닥치면 바로 낭떠러지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없다 보니 스스로 가난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 자산 형성해야 가난 탈출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 이유는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석상훈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이 ‘한국복지패널’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빈곤층은 고용을 통해 소득이 늘어도 ‘자산빈곤’ 때문에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녀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산빈곤이란 총자산에서 총부채를 뺐을 때 남는 자산이 최저생계비 3개월 치를 밑도는 경우다. 석 위원은 “지금까지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의 복지정책만으로는 자산 형성을 돕지 못해 근본적인 빈곤 탈출이 어렵다”며 “중산층으로 올라갈 만큼 자산을 만들지 못하면 아예 빈곤층으로 남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빈곤층의 자산 형성을 돕기 위해 지난해 근로빈곤층에 현금을 지원하는 근로장려세제(EITC)를, 올해는 저축으로 자산 마련을 돕는 희망키움통장제도를 도입했다. 아직까지 지원금액이 적고 대상자 폭도 좁다.
노대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체 근로빈곤층 가운데 자활사업, 사회적 기업 육성정책,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의 혜택을 받은 대상자는 약 10만 명, 근로장려세제는 59만 가구 정도”라며 “빈곤층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당겨 복지 대상자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위원은 기초생활보장급여를 장애인 노인 같은 근로무능력자와 근로능력자로 분리하고 근로능력자에게는 의료 교육 주거급여 패키지와 함께 취업 창업 같은 일자리 서비스를 같이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고용과 복지를 연계해 한 단체나 기관이 초기 상담부터 사후 관리까지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매월 10만원 저금땐 3년후 목돈 2300만원 수령 ▼ 가난탈출 꿈 쑥쑥 ‘희망키움통장’
방문학습 교사로 일하는 이모 씨(49·여·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요즘 통장에 돈이 불어나는 재미로 산다. 10년 전 남편이 운영하던 건설회사가 부도 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지만 통장만 보면 힘이 솟아난다.
월수입 110만 원에 두 아이를 키우는 이 씨는 올 9월부터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했다. 이 씨가 매월 10만 원을 저금하면 서울시의 장려금 40만 원과 후원금 10만 원이 추가로 통장에 입금된다. 2013년 9월이면 목돈 2300만 원을 쥐고 기초생활수급자 생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 씨처럼 근로능력이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중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한 저소득층은 올 10월 전국에서 1만 가구를 돌파했다.
보건복지부는 근로능력이 있는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빈곤탈출 프로그램을 올해 초까지 가동하지 못했다. 저소득층은 근로능력이 있어도 차상위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 수준을 넘는 순간 많은 복지 혜택을 잃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을 지원할 재원도 부족했다.
지난해 보건사회연구원 조사 결과 근로능력이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28만 명 중 기초생활수급자를 벗어나길 희망한 사람은 19%에 불과했다. 기초생활 제도에 대한 의존증은 점점 심해졌다.
희망키움통장은 일과 복지를 연계한 프로그램 중 하나로 복지부가 올해부터 시행한 제도. 하지만 지금까지 가입률은 저조하다. 가입자들이 스스로 돈을 벌어 자녀 학비나 의료비를 감당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희망키움통장은 올 상반기까지 근로소득이 최저생계비의 70% 이상인 기초생활수급자만 가입할 수 있어 문턱이 높았다.
복지부는 통장 가입자를 내년까지 3만 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여전히 ‘언 발에 오줌 누기’란 말이 나온다. 3만 명도 근로능력이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수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90%는 정책의 음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복지부 배병준 사회정책선진화기획관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간의 복지혜택 격차가 줄지 않는 한 빈곤탈출 프로그램이 가속도를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내년부터 희망키움통장 가입자에 대해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상으로 올라가도 2년 동안 교육비와 의료비를 지원하고 시간당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제공해 빈곤 탈출의 기회를 확대하기로 했다. 또 탈(脫)빈곤 희망자에 대한 미소금융 지원, 주택 개보수 사업 참여, 자격증 취득 지원 등을 통해 복지혜택 격차를 계속 줄여 나갈 계획이다.
복지부는 또 일과 복지를 연계한 ‘일자리 정책’에도 페달을 밟고 있다. 저소득층 일자리 마련 예산은 올해 1조476억 원에서 내년 1조1913억 원으로 늘어난다. 내년에는 35만6000개의 저소득층 일자리가 예산 지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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