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장기하와 얼굴들’과 영화 ‘불청객’의 공통점은?

기타 입력 2010-09-27 18:56수정 2010-09-2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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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림동 고시생 옥탑 방에서 만든 '싸구려 걸작'?
● 감독이 1인多역을 수행하는 고독한 88만원 세대의 도전장


영화 ‘불청객’은 2000만원으로 만들어진 초저예산 SF영화다

"다시 찰리 채플린의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영화 시사회장을 나서던 한 평론가는 이렇게 촌평했다.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교차시대인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영화인이다. 그는 감독은 물론 각본, 주연, 편집 심지어 촬영까지 도맡는 등 1인 다(多)역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물론 이는 영화산업에 체계적인 분업이 생기기 이전 영화 제작을 위한 불가피한 현실의 반영이었다. 게다가 감독의 구상을 이해할 만한 조력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영화사(史)가들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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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산업에 투입된 자본도 많아지고 영화 인력도 급증한 21세기에 다시 채플린 시대의 영화 제작법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거대 상업영화들의 제작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1인 감독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미디어 제작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에 필요한 것은 창의력이지 자본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대목인 셈이다.

영화에 출연한 등장인물은 감독의 옥탑방 이웃 형들로 무보수로 출연한 아마추어 배우다. 그러나 그로 인해 현실감이 넘친다.

■ 제작비 겨우 2000만원? 4년에 걸친 고독한 대장정

"후줄근한 고시생들이 거주하는 어느 옥탑 방. 어느 날 큰 폭발음과 함께 정체 모를 소포상자가 배달된다. 상자를 열자 4차원 공간에서 날아온 '포인트맨'이 자취생들에게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과의 종신계약이 성립됐음을 고지한다. 이어 옥탑방과 함께 우주로 납치된 세 주인공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포인트맨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영화 '불청객')

영화계는 추석대목이 한창이다. 한류스타 송승헌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무적자'와 연기파 배우 설경구가 등장한 '해결사', 그리고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맞붙어 영화시장을 삼등분한 형국이다.

이 같은 주류 영화시장과는 전혀 맥락이 다른 작품이 9월30일 일반 관객에게 공개된다. 한국에서는 조금은 낯선 SF장르를 내세운 '불청객'(감독 이응일)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향토SF' '정통 B급 영화'란 촌스러운 카피를 내세운 영화 '불청객'은 지난 7월 제 14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이며 관객은 물론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몇 차례 시사회를 진행한 현재도 네이버 영화평점이 이례적으로 9점을 넘을 정도다.

"다음 세대의 영화를 보았다. 궁극적으로 한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경외감을 느낀다. 이 시대에는 이런 재능이 필요하다."(영화평론가 김영진)

영화 ‘불청객’은 조악한 화질을 자랑하지만 편집과 사운드 그리고 창의성만은 상업 영화를 능가한다

1977년생인 감독은 마치 찰리 채플린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각본, 연출, 촬영, 편집, CG 작업을 혼자 해내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제작기간은 무려 4년. 심지어 신림동에서 그와 동거했던 옆방 형들이 실명(實名)배우로 출연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게다가 완벽한 1인 제작 시스템으로 SF영화의 제작비가 불과 2000만원이라는 점도 영화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유의해야할 점이 있다. 감독이 "이 영화를 DC인사이드에 바친다"라고 영화 전면에 고지했듯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B급 정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영화가 상영되는 1시간10분 내내 고역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미숫가루를 타먹는 백수들의 모습은 이 시대 룸펜(Lumpen)들의 찌질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이 영화의 외견은 한 마디로 누추하기 그지없다. 제대로 연기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배우의 초라한 패션은 물론이고, 16mm 가정용 홈 비디오로 촬영한 것과 같은 조악한 화질, 그리고 어설픈 CG화면은 1000억 원짜리 '아바타' 등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높이를 철저하게 배신한다.

그런데 이른바 'CG 등 화질의 완성도'란 프레임에서 벗어난다면 이런 영화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조악한 배경은 88만원 세대의 처절한 현실로 뒤바뀌고, 투박한 CG 속에서는 감독의 뜨거운 땀방울이 읽히며 연기력 전무한 배우들의 담담한 눈빛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리티를 선사하는 식이다.

특히 한 번이라도 영화제작을 꿈꿔본 영화 마니아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텍스트로 변신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2000만원 가지고 이 같은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나도 가능할까?

영화에서 악당 ‘포인트맨’으로 직접 출연한 이응일 감독

■ 장기하가 도전했던 '88만원 제작방식'의 연장선…

"배경은 실제 저희가 살던 옥탑 방이에요. 형님들에게 재미삼아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지요…최종 CG작업 때는 정말이지 3개월 동안 작업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완성했어요…제가 고시를 친 건 아니지만 자격증 시험에 실패했고. 직장도 한 2년 다니고 홍보영상을 찍으며 생계유지를 해봤는데, 영화만큼 제가 잘 할 자신이 있는 게 없더라고요…"(감독 이응일)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으로 독립영화 제작 몇 편이 경력의 전부인 이응일 감독의 '제작의 변'을 들어보면 이 영화는 보다 현실적인 88만원 세대의 선언서로 읽히기도 한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그 시대 누구나 마찬가지로 취업난을 겪어야 했고, 결국 자신의 꿈인 영화판으로 회귀해야 하는 고통스런 청춘의 기록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영화 '불청객'의 배경이나 제작 방정식을 되짚어보면 지난해 크게 히트한 인디밴드인 '장기하와 얼굴들'의 스토리와 묘하게 겹친다는 점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옥탑방은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에 나오는 자취방을 꼭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서울대 출신으로 룸펜시절을 겪었으면서, 심지어 예술을 꿈꾸며 채택한 문화상품 제작 방식도 거의 일치한다.

"CD를 만드는 게 그리 큰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스튜디오를 빌려서 음악을 직접 녹음하는 거지요. 그리고 CD는 컴퓨터로 하나씩 구우면 되고요, 앨범자켓이나 포장도 직접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하나씩 프린트해서 만들었어요. 경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했고요."(장기하)

영화 '불청객'에도 시대에 대한 88만원 세대의 저항의 목소리가 내포돼 있다. 악당의 출신 배경이 초국적 자본을 상징하는 '론스타'에 대한 패러디인 것은 물론이고, 악당은 노골적으로 젊은이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얽매여 있는 '포인트'(학점이나 영어점수 심지어 소매점 포인트까지)'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의 더 결정적인 공통점은 큰 자본 없이 자신과 친구들(혹은 후원자)의 힘만으로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장기하 씨는 이 같은 독립적 문화활동을 총칭해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포스터

■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 "적게 쓰고 적게 벌자!"

영화 '불청객' 역시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감독의 뚝심 하나로 밀어붙인 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주연 배우는 옆방의 친구를 꼬드겨 섭외했고, 악당배우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이 직접 출연해야 했다. SF영화의 필수요소인 CG를 위해서 직접 한 장면 한 장면 컴퓨터로 그래픽 작업을 거쳤다. 모두 431컷의 CG 작업은 보통 영화시스템에서는 컷당 수백만 원이 소요되지만, 이 감독은 이를 돈이 아닌 창의력과 몸으로 대신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 상황까지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다"며 "어설프지만 나름의 개성과 매력이 있으니 재밌게 봐 달라"고 말하는 감독과 제작진의 변명은 말 그대로 리얼리티가 담긴 솔직담백한 고백인 셈이다.

이 영화가 어느 정도까지 흥행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이응일 감독은 분명하게 보다 나은 투자를 받아서 새로운 SF영화에 도전할 것이란 사실이다.

뉴질랜드의 촌구석에서 '고무인간의 최후'란 싸구려 데뷔작을 발표한 피터 잭슨 감독은 20년 뒤에는 '반지 원정대'와 '킹콩'의 감독이 됐다. 또한 외계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당도한다는 '디스트릭트 9'란 페이크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닐 블롬캠프 감독은 이후 피터 잭슨의 투자를 받아 멋들어진 블록버스터 형식으로 '디스트릭트 9'를 완전히 새롭게 촬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응일 감독의 도전은 뻔히 익숙한 사실을 재확인한다. 한국의 SF영화는 자본이 없어서가 아니고, 용기와 창의성 그리고 이를 수행할 인재가 없어서 실패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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