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에 빠진 아이들]“인터넷-TV에 나온 말, 애들 다 써요” 무방비 흡수→유행 악순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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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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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따라서… 게임하다… 국어 답안지 비속어 쓰기도“욕하면 강해보여” 잘못 인식“또래 소속감 위한 것” 분석도

《“얘, 이 수첩 영 별로다. 싼마이 같지 않니?” “왜, 내가 보기엔 쥑이는데.” “얘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랄이야.” 10일 서울 강동구 한 초등학교 문방구 앞에서 초등학생 두 명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김모 씨(38)는 깜짝 놀랐다. “지금 쓴 말 어디서 들었니?”라고 묻자 학생들은 심드렁하게 “TV에 다 나오는데…. 애들 다 써요”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친구를 보더니 다시 한마디 했다. “선생님이 쟤 조졌는가 뿌다.” 방송과 인터넷 등에서 사용된 욕설과 비속어가 청소년들의 현실 생활에서 여과 없이 사용되는 사례다.》

이향숙 한국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아이들을 상담한 결과 갈수록 표현이 과격해지는 인터넷과 영상매체가 청소년 언어오염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면서 “이들 매체의 유해 언어가 아이들의 현실 생활과 연결돼 악순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인터넷과 TV에 과다 노출 영향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욕설과 비속어 사용이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주요 원인으로 인터넷과 영상매체를 꼽는다. 청소년들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인터넷에 접속하고 종일 TV를 보는 등 과다하게 노출되다 보니 유해 언어의 사용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TV의 경우 욕설은 걸러지지만 반말, 비속어와 은어, 비표준어 등이 빈번히 등장한다. 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막말성’ 반말이나 저속한 표현을 방송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민증 까봐야’ ‘싸가지’ ‘허벌나게’ ‘쎄가 빠지게’ ‘싼마이’ 등 지상파 프로그램에서 나온 비속 표현들을 지적했다.

이향숙 소장은 “방송의 비속어가 TV를 시청한 학생에게 흡수되고, 이 말이 교실에서, 학원에서 만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금세 퍼지는 게 현실”이라면서 “누가 유행어를 빨리 쓰느냐는, 바람직하지 않은 속도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TV의 연예인들은 청소년들이 따르고 싶은 롤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방송에서 사용하는 연예인의 말은 파급력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인터넷은 한층 심각하다. 청소년들은 ‘깜놀(깜짝 놀랐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등 인터넷에서 비롯된 은어를 자주 접한 결과 현실에서도 이를 구분 없이 쓴다. 최근 중학교 전국학력평가 국어시험지 답안지에는 ‘○○가 슬프다’라는 정답 대신 ‘○○가 안습(안구에 습기 차다는 뜻으로 슬픈 상황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이라는 답까지 등장했다.

더욱 큰 문제는 익명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인터넷에 욕설이 난무하는데 청소년들이 여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10대 청소년들이 즐기는 온라인 게임과 인터넷은 오염 수위가 높은 욕설을 실시간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10일 서울 양천구 PC방에서 만난 중학생 두 명은 컴퓨터를 보면서 끊임없이 혼잣말을 이어갔다. “한 마리만 더 잡으면, 이 쓰레기 새×.” “아 권총으로 대가리 맞았네. × 됐다, 병신 새×.” “개지× 떨더니….”

한때 유행이던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는 영화들엔 ‘×까라’ ‘니미’ ‘×발’ 등의 욕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이런 영화들이 연령 제한 조치를 받는다 해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쉽게 성인 영화를 내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Fu××’ ‘×같은 년’ 같은 용어가 등장하는 일부 대중가요 역시 TV에서는 통제된다 해도 인터넷에서는 쉽게 듣거나 가사를 검색할 수 있다.

○ ‘그들만의 유대감’ 강화하는 촉매제?

고려대 상담소의 윤혜영 연구원은 청소년들의 욕설에 대해 “나쁜 언어의 공유는 소속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또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욕설이나 비속어의 사용이 청소년 간에 서로 친하다는 느낌을 주면서 유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또래와 소속감을 갖거나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욕설과 비속어를 습득하게 된다.

청소년들이 욕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다가도 막상 대학에 진학하면 이 문화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욕설이 집단 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관악구 봉천동 봉원중 교사인 이경애 씨는 “욕설은 억압된 청소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서 쓰이기도 한다”면서 “특히 심한 욕을 하면서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 여기고, 욕을 통해 어른들의 ‘파워 게임’을 빠르게 답습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더 거칠고 강한 어른이 사회에서 ‘세다’는 왜곡된 측면을 부각해 보고, ‘욕설=강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범죄를 저지르는 미성년자의 연령층이 낮아지는 것이 거친 언어 사용과 무관하지 않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언어란 소통의 매체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친 언어는 상대방에 대한 거친 행동으로 귀결된다는 진단 때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동영상=습관적으로 ‘X발’ 내뱉는 아이들, 우리는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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