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 드라마캐릭터열전① 순수함과 폭력의 공존… 김탁구의 이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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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9일 13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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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현대판 홍길동
● 들개 같은 야성마저 연민의 정 불러 일으켜
● 희망 없는 시대, 희망 아이콘

어머니를 잃은데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김탁구는 순수와 희망 상실의 시대, 동정심을 유발하는 \'희망 아이콘\'으로 꼽힌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어머니를 잃은데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김탁구는 순수와 희망 상실의 시대, 동정심을 유발하는 \'희망 아이콘\'으로 꼽힌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참, 단순하다!
12세 소년이 장장 12년의 세월을 몸뚱어리 하나로 버티며 전국 방방곡곡을 훑고 다닌 이유는 괴한에게 납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엄마를 찾기 위해서였다. 잃어버린 어머니 찾기, 즉 모성(母性)의 복원은 소년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다. 12세 소년이 만두가게와 정육점 등을 전전하면서 세상의 평지풍파속에 24세의 청년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년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삶의 이유이자 자신의 존재 기반인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24세 청년의 정신세계를 12세 소년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참, 단순한 이력이다.

▶ 엄마 찾는 소년의 모성 복원 의지

행방을 알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달리 소년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자의식보다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알아챈 영민함 때문이지만,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재했던 아버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제빵업계의 명장이자 최고 경영자로 우뚝 선 아버지라 하더라도 소년에겐 그저 '회장님'일 뿐이었다. 이렇게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준 존재였기에 어머니에 대한 소년의 그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동안 정신적¤육체적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에는 눈물이 맺히는 것이고 그가 성공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싶어지는 것일 게다.

너무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처투성이로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에게서는 현대판 '홍길동'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누나를 누나라 부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소년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위해 꿋꿋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이 아이는 시골로 돌아간 어머니가 납치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아들이기를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세상은 12세 소년이 감당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소년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유일한 단서인 '바람개비 문신 사내'를 좇아 들개처럼 거칠게 전국 방방곡곡을 훑고 다닌다. 그리고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제빵계의 명장이 운영하는 제빵점에서 '바람개비 문신 사내'와 대면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어머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절망과 방황의 시작…. 이후 우연히 다시 만난 첫사랑을 통해 삶의 또 다른 이유를 찾고 그의 바람대로 제빵왕이 될 것을 다짐한다.

이처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첫사랑에게서 보상받은 청년은 제빵계의 명장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빵에 관한 선천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지독한 수련 과정을 거쳐 마침내 명실상부한 제빵인으로 성장한다.

그 과정이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일등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했기에 청년은 진정한 제빵왕이 되었다. 그 청년은 바로 KBS2 수목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김탁구'다.

제빵업계의 명장인 아버지가 김탁구에겐 그저 '회장님'이었다.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해 준 어머니의 부재는 '순수 소년' 김탁구를 때때로 '폭력 청년'으로 돌변케 한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제빵업계의 명장인 아버지가 김탁구에겐 그저 '회장님'이었다.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해 준 어머니의 부재는 '순수 소년' 김탁구를 때때로 '폭력 청년'으로 돌변케 한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 빵을 통해 되찾은 김탁구의 순수성

어린 시절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탁구를 잘 해서가 아이라 높을 탁(卓), 구할 구(求), 김탁구입니더!"라고 씩씩하게 큰 소리로 외치던 소년이 온갖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뎌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소년 김탁구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를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바꿔냄으로써 옆에 있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지만, 그 출생만큼은 남달랐다. 부모 세대의 애증의 갈등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할 정도로 축복 받지 못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김탁구는 '주먹 같은 거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바람처럼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정직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특히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친구 신유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드는 소년 김탁구의 모습은 정직과 솔직함을 넘어선 정의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의 김탁구는 뻔히 보이는 상황조차 믿을 수 없는, 현실 속 부조리함에 지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소년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로운 소년은 유일한 버팀목이자 보호막이었던 어머니를 잃어버리면서 사나운 들개로 변해버렸다. 세상을 떠돌면서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김탁구는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주먹을 앞세우는 폭력적인 존재로 각인됐다.

그래도 그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슴 속에 품은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육체적 외상을 견디다 못한 김탁구가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시청자들이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처럼 김탁구의 내면에는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순진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천진난만함과 주먹을 앞세우며 분노를 표출하는 폭력성이 공존하고 있다. 어머니를 찾겠다는 삶의 이유에 내재되어 있는 순수함과 착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어머니와 자신을 배반한 세상과 맞서려는 폭력성이 교차하는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던 들개 같은 김탁구의 야성(野性)은 부드러운 감촉의 빵에 의해 변화되기 시작한다.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던 어머니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또 다시 세상을 떠돌던 김탁구를 변화시킨 것이 그토록 싫어하던 빵이었다.

어린 시절, 이른 새벽 은은하게 퍼지는 빵 굽는 냄새에 취해 잠결에 아버지의 작업실까지 찾아갔다가 맛봤던 빵의 따뜻한 기억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김탁구를 괴롭힌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후각에 의한 제빵 감각이었다. 이렇듯 김탁구에게 '빵'은 어머니와 다른 차원에서 김탁구의 존재를 부각시켜주는 도구이다.

제빵에 대한 김탁구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물론 그의 아버지 구일중이지만, 그것을 집중적으로 개발시켜주는 이는 구일중의 스승이자 제빵계의 숨은 명장 팔봉 선생이다. 김탁구는 팔봉 선생에게서 반죽 숙성과 빵 굽기 기술을 배우며 기다림의 의미를 깨닫고 잠시 잊고 있었던,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자각한다.

그리고 팔봉 선생의 외손녀이자 절대 미각과 손 감각으로 다섯 살 때부터 빵을 만들어온 빵 신동 양미순의 도움으로 제빵 기술을 몸에 익히기 시작한다. 어머니를 찾지 못해 절망하고 첫사랑 신유경 때문에 고통 받던 김탁구가 어머니와 같은 이름의 양미순에게 위로받으며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던 김탁구가 "주먹은 제일 마지막에 쓰는 거야!"라며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하는 양미순에게 정신적 위안을 얻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양미순은 김탁구의 제빵 인생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반면 신유경은 첫사랑의 순수함을 버리고 돈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로 변신한다. 신유경은 김탁구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이용하고 배신하며 상처를 주는, 김탁구 인생의 트라우마와 같은 존재가 된다.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던 김탁구는 양미순에게 정신적 위안을 얻는다. 양미순은 김탁구의 제빵 인생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던 김탁구는 양미순에게 정신적 위안을 얻는다. 양미순은 김탁구의 제빵 인생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다. 사진제공 삼화네트웍스.

▶ 음모론 난무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캐릭터

축복받지 못한 출생만큼 성의 없이 지어진 이름이지만 김탁구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높은 것을 구한다'는 이름값을 멋지게 성취한다.

그가 구하고자 하는 최고는 제빵계의 명장이고, 그가 구하고자 하는 난세(亂世)는 희망을 잃어버린 현실이다. 김탁구는 이처럼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숨 막히게 달려왔던 산업화 시대,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민주화 시대의 부모와 단절된 자식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서인숙의 정신적 폭력과 한승재의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는 김탁구를 보면서 함께 아파하며 가슴 졸이고, 온갖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김탁구가 제빵계의 명장으로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기뻐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김탁구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음모론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드라마 속 캐릭터다. 바로 그렇기에 진실을 향한 갈증이 유난히 심한 2010년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김탁구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청년일 것이다.

성공의 씨앗을 뿌리고 희망의 정서를 전달하는 김탁구는 어쩌면 생존 논리에 찌들어 잃어버린, 그러나 반드시 되찾아야 할 우리들의 초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수많은 시청자들이 김탁구를 사랑하는 것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에게서 미래지향적인 삶의 지침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존 논리를 핑계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피폐한 현실의 2010년. 우리는 김탁구에게 빚진 것이 많다. 어떻게 해야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 편집자주: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가 앞으로 격주로 화제의 한국 드라마 속 캐릭터를 사회·문화·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드라마캐릭터열전'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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