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말하면 없던 호랑이가 만들어진다는 고사성어로, 근거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곧이듣게 됨을 말하죠.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해석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흔히들 집단의 파급력에 빗대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 사람이 아니라 수만 명의 게이머들이 한목소리를 내면 어떻게 될까요? 단순한 소문 정도가 아니라, 실제 게임의 결말이 바뀌고, 없던 시스템이 추가되는 등 개발사의 방향성 자체를 뒤흔드는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죠.
매스 이펙트 3 / 사진=EA 공식 홈페이지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것이 ‘매스 이펙트 3’의 엔딩 수정 사건입니다. 2012년 출시된 이 게임은 장대한 SF 3부작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전 세계 팬들의 엄청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출시 직후 게이머들이 마주한 엔딩은 충격과 분노 그 자체였습니다. 1편부터 3편까지 이용자가 신중하게 내렸던 수많은 선택이 결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단순히 세 가지 색깔의 광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준의 부실한 연출로 서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용자들이 컵케이크까지 보냈다 / 사진 = 해외이용자커뮤니티이에 분노한 이용자들은 ‘리테이크 매스 이펙트(Retake Mass Effect)’라는 캠페인을 조직해 집단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온라인 게시판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사인 바이오웨어에 엔딩 수정을 요구하며 약 400개의 컵케이크를 보내는 등 독특한 방식으로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초기 바이오웨어는 창작자의 예술적 무결성을 강조하며 수정을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여론의 악화와 언론의 집중 보도가 이어지자 결국 입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엔딩을 바꿔준 DLC / 사진=EA 공식 홈페이지그 결과 바이오웨어는 2012년 6월, 기존 엔딩의 설정 오류를 수정하고 캐릭터들의 후일담을 대폭 보강한 ‘엔딩 확장 컷(Extended Cut)’ DLC를 무료로 배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업데이트를 통해 기존 5분 내외였던 엔딩 영상은 수십 분 분량으로 늘어났고, 이용자의 선택에 따른 은하계의 운명과 동료들의 생사를 보다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여기에 팬 서비스 성격이 강한 ‘시타델’ DLC까지 이어지며, 성난 팬심을 어느 정도 되돌리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개발사의 가벼운 농담을 게이머들이 광기 어린 화력으로 받아쳐 게임의 시스템 자체를 뒤바꿔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바로 ‘컬트 오브 더 램’의 이야기인데요.
컬트 오브 더 램 육신의 죄 DLC / 사진=컬트 오브 더 램 공식 X(구 트위터)사건의 발단은 개발사인 매시브 몬스터가 공개한 DLC 포스터였습니다. ‘육신의 죄’라는 제목답게 나뭇잎으로 주요 부위만 가리고 춤을 추는 추종자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이를 본 이용자들은 농담삼아 “짝짓기 시스템 업데이트다!”라며 폭발적인 반응을 쏟아냈죠. 이 반응은 SNS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 하나의 거대한 밈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개발진은 처음에는 그저 이용자들의 밈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이용자들의 열기가 식지 않자 결국 “연말까지 공식 계정 팔로워 30만 명을 달성하면 진짜로 추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그러자 이용자들은 일제히 화력을 집중했고, 목표 수치는 불과 2시간 만에 달성됐습니다.
순식간에 이용자들이 모였다 / 사진=컬트 오브 더 램 공식 X(구 트위터)당황한 개발사는 “설마 진짜 해낼 줄 몰랐다”고 반응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실제 업데이트를 통해 교배 텐트와 알 부화 시스템이 정식으로 도입됐죠. 물론 심의 수위를 고려해 직접적인 묘사 대신 간접적인 연출과 알을 얻는 방식으로 표현됐지만, 이용자의 요구와 게임의 정체성 사이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PC버전으로 등장하게 된 다크소울 / 사진=스팀 스토어지금은 PC로 즐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다크 소울’의 PC 버전 역시 팬들의 강력한 요구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본래 프롬소프트웨어의 이 작품은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 전용 콘솔 게임으로 기획됐습니다. 그러나 특유의 높은 난이도와 독창적인 세계관이 입소문을 타며 PC로도 이 게임을 즐기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이용자들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명 운동이 벌어졌었다 / 사진=체인지닷오알지당시 유통사인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 측 관계자가 “충분한 수요가 입증된다면 고려해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팬들은 즉시 체인지닷오알지(Change.org)를 통해 대규모 온라인 서명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이 운동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최종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유효 서명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결국 반다이남코는 2012년 ‘프리페어 투 다이 에디션’이라는 이름으로 PC 버전을 공식 출시하게 됐죠. 이런 전례를 생각하면 여전히 많은 팬이 염원하고 있는 ‘블러드본’의 PC 버전 역시 언젠가 현실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존 프로드맨 / 사진 = 워프레임 공식 홈페이지이용자가 만든 밈을 존중하고 실제 캐릭터로 만들어준 개발사의 사례도 있습니다. ‘워프레임’의 ‘존 프로드맨’ 전설이 그 주인공입니다.
2014년 워프레임 공식 포럼에 올라온 한 장의 스크린샷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코퍼스 진영의 평범한 일반 병사인 ‘프로드 크루맨’이 전기봉 하나만으로 강력한 보스 ‘보어’를 쓰러뜨리는 장면에서 비롯됐습니다. 이용자들은 이름 없는 병사에게 ‘존 프로드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우주 최강의 은둔 고수”라는 설정까지 덧붙이며 하나의 거대한 밈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결국 정말로 최강이 되어 히든 보스로 등장했다. 사진은 사인 포스터 / 사진=해외 이용자 커뮤니티 레딧개발사인 디지털 익스트림즈는 이를 단순한 장난으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용자들의 유머를 공식 설정으로 흡수해 게임 속 전설적인 존재로 편입시켰죠. 실제로 워프레임의 아레나 콘텐츠 ‘인덱스’에서 1시간 이상 생존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히든 보스로 존 프로드맨이 직접 등장하도록 업데이트를 추가했습니다.
그를 쓰러뜨린 이용자는 친필 사인이 담긴 포스터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고, 함선에 전시할 수도 있는데요. 개발사가 이용자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게임 안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이 괜히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례인 것 같네요.
이렇듯 사람들이 모이면 없던 콘텐츠조차 현실이 되기도 하는데요. 앞으로 수만 명의 이용자들이 또 어떤 움직임으로 게임 업계에 영향을 주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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