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드라마, 노래까지… 요란한 컴백의 득과 실
● 비운의 아이돌 이미지, 팬덤에 불 지펴
● 잘나갈수록 지지층 줄어드는 딜레마 극복 어떻게?
13일 발매된 박재범의 미니앨범 ‘믿어줄래’는 발매 당일에만 2만1989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노래, 영화 등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재범의 갑작스러운 '전화위복'이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제공 비타민엔터테인먼트
아이돌그룹 2PM의 전 멤버 박재범(23)이 '활황'을 맞고 있다. 재범은 현재 거대 매니지먼트사 싸이더스HQ와 전속계약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싸이더스HQ 정훈탁 대표가 재범의 아버지와 만나 계약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싸이더스HQ는 전지현, 한예슬 등이 소속된 회사다. 올 초만 해도 JYP엔터테인먼트로부터 계약 해지 당하고 공중으로 뜬 상황이었던 박재범에게 이쯤 되면 대단한 전화위복인 셈이다.
거기다 아직 전속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현 시점만 해도 재범은 이미 댄스영화 '하이프네이션' 주연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고 가을 방영 예정인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천재가수 역 캐스팅 물망에도 오르내리고 있다.
재범이 유튜브채널에 올린 UCC는 조회수 100만 건을 돌파해 미국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으며, 지난 13일 발매된 재범의 미니앨범 '믿어줄래'는 발매 당일에만 2만1989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재범만큼 화제의 중심에 서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인물은 없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일개 아이돌그룹 멤버에 불과했던 인물이 갑자기 연예 산업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 수직급상승,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축하할 일인 건 맞다. 어찌됐건 한 연예인의 죽었던 커리어가 되살아난다는 건 연예인 개인으로서나 산업 전체로 봐서나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같은 커리어 수직급상승이 되레 재범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언뜻 이해가 안 갈 법 하지만 한국 아이돌 산업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면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한국 아이돌 산업이 시동을 건 시점은 공교롭게도 1997년 IMF 외환위기 시점과 일치한다. 1차 아이돌 붐 주역이었던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은 모두 1996~98년 사이 등장했다. 한 마디로 경제 불황기 아이돌이었던 셈이다.
경제 불황기 아이돌의 론칭 방식은 여느 시기와 사뭇 다르다. 말 그대로 '우상'격 이미지메이킹이 아니라 '평범함' '소박함' '소탈함'을 강조해야 한다. 살갑고 친근한 이미지를 통해 삶에 지친 대중으로부터 동질감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 존재에 대중은 위안을 받는다.
아이돌 천국 일본만 해도 1980년대 버블경제 시기에는 '윙크' 등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아이돌이 대세였으나 버블이 붕괴된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는 옆집 아이들 같은 '모닝구 무스메' 등이 인기를 끌었다. 불황 심리라는 건 어느 문화권에서나 대개 닮기 마련이다.
결국 경제 불황기 아이돌이란 '우리와 같은 아이들'로서 대중이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한계, 고통, 딜레마를 대변해주는 존재다. 그러다보니 아이돌 이미지는 사실상 '약자'라는 컨셉트에 맞춰지게 됐다.
경제 불황기 대중 자체가 대부분 마이너리티 의식을 갖고 있으니 자신과 닮은 아이돌 역시 당연히 마이너리티고 약자가 돼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약자에 대한 지지심리가 아이돌 인기의 밑바탕이 됐다. 어찌 보면 자기 응원에 가까운 형태다.
그렇다면 강자는? 아이돌이 소속된 연예기획사다. 힘없고 나약한 아이돌을 쥐고 흔들며 돈을 뽑아내려 하는 악덕고용주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인식은 돼있고 대중이 그런 구도를 선호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 불황기 대중 정서란 약자 또는 최소한도 약자로 보이는 쪽을 옹호하고 지지하며 강자로 보이는 쪽에 무조건적 반발 심리를 보이는 식이다.
대중문화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심리 구조다. 강자가 나쁘게 보이면 보일수록 약자는 그만큼 더 응원하게 된다. 때로는 약자를 더 응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자를 더 나쁘게 인식하기도 한다.
이런 구조 내에서 일반 대중은 아이돌의 성장을 바라보며 대리만족 심리를 충족시키고 팬덤은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 '나쁜 기획사'로부터 '불쌍한 우리 오빠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자처하게 됐다. 그게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된 아이돌과 대중, 팬덤 간 '약속'이다.
▶ '강자'인 기획사로부터 '약자' 연예인을 지킨 팬덤
지난 3월 서울 청담동 JYP사옥 앞에서 팬들이 재범 영구탈퇴를 반대하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붙이는 모습. 팬들은 '절대 강자' 소속사로부터 '약자' 재범을 보호하는 팬덤을 보였다. 사진제공 연합뉴스. 재범이 지난 1년여 간 얻은 대중적 인기와 응원은 바로 이런 심리를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옳다. 재범은 지난해 가을 '한국 비하' 사건 당시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명확한 약자-강자 구도가 나왔다. 재범에 대한 대중의 지지심리는 재범의 고생담이 밝혀질수록 더 커졌고, 재범을 빼앗긴 2PM에 대한 지지심리도 동시에 나왔다. 재범의 한국 비하 역시, 한국에 사는 걸 딱히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경제 불황기 대중 심리에 의해 일정부분 '이해할 만한 일'로 치부될 수 있었다.
그러다 올 초 재범이 JYP엔터테인먼트로부터 완전 퇴출당하는 사건이 불거지자 재범에 대한 대중의 지지심리는 더더욱 커졌다. 이번에는 2PM 멤버들까지 재범을 비판하며 그의 퇴출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 더 큰 반발을 샀다.
기획사로부터도, 동료들로부터도 버림 받은 재범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 비운의 아이돌로 보였고 사회로부터 각박한 현실을 부여받은 대중은 모든 부분에서 궁지에 몰린 재범에 정확히 반응했다.
재범이 유튜브채널에 올린 UCC는 조회수 100만 건을 돌파해 미국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UCC까지도 100만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가 됐다. 아예 2PM 안티로까지 돌변한 팬덤은 더욱 견고해졌고 그의 솔로 앨범이 나오자마자 2만장을 삽시간에 사줄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야말로 인생대역전, 대중의 대리만족 심리가 100% 충족되는 순간이다.
재범의 연예계 인생이 꽃피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현 시점이야말로 오히려 재범에겐 위기가 되고 있다. 희한하지만 그렇게 보는 게 옳다.
지금 재범은 '지나치게' 잘 나가고 있다. 대형 연예기획사는 물론 영화제작사, 방송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범이 지난 1년여 간 모은 화제성과 꾸준히 지속되는 대중의 관심도에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애초 재범의 인기가 '약자 중의 약자'임을 팔아 얻어진 것임을 생각해볼 때, 봇물처럼 터진 재범에의 러브콜은 대중의 지지심리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건 드라마건 음반이건 러브콜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거대 매니지먼트사까지 접근한 현 시점, 재범은 절대 약자가 아니다. 그저 한국 비하했다고 미국으로 쫓겨났다가 논란 마케팅을 일으켜 불과 몇 개월 사이 대박이 난 인물로만 보일 뿐이다.
약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잘 이용한 처세술의 달인처럼 보인다. 벌써 그 역효과도 속속 감지되고 있다. 재범의 캐스팅 소식 등을 전하는 뉴스에는 점차 재범을 비난하는 댓글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비하 사건까지도 다시 되짚으며 2차 비판이 일고 있기도 하다.
▶ '약자' 이미지 끌고 가야 할 재범의 딜레마
이게 바로 재범의 가장 큰 딜레마다. 잘 풀리면 비난이 일어나고, 오히려 안 풀릴 때 지지를 받는 희한한 케이스다. 이런 복잡한 대중 심리를 충족시켜 주려면 재범은 한 단계씩 과정을 밟아 성장했어야 했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밑바닥에서부터 악전고투를 겪으며 올라오는 언더도그(underdog·약자) 신화를 연출해줬어야 했다.
대중이 재범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꾸준한 응원심리가 유발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동방신기가 일본에서의 악전고투를 들려주며 기획사 인형들 같은 기존 이미지를 말끔히 쇄신했듯이 말이다. 순식간에 대박이 나버린 현 상황은 그저 '한국 비하했다가 뜬 연예인'으로만 압축될 뿐이다.
현재 재범의 솔로음반 '믿어줄래'는 각종 음원 차트에서 신예 여성 아이돌그룹 미쓰에이에 조금씩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음반 판매에서만 대박이 난 경우라는 것이다. 그만큼 열혈팬들의 성원은 컸지만 일반대중은 점차 재범에게 관심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다.
재범은 과연 이처럼 복잡한 딜레마,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린 상황을 어떻게 반전시킬 수 있을까. 기획사로부터 쫓겨나는 최악의 상황을 180도 뒤집어버린 '역전의 명수'라면 과연 이번에도 상황을 반전시켜 성공에 이를 수 있을까.
대중문화산업의 향방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재범의 '약자 마케팅'은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한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줘도 더 이상 효과가 나올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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