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외벽과 삼엄한 경비가 눈에 띄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연희베벌리힐스 아파트 전경. 현재 가격이 20억~22억 원 선인 이 아파트는 인근 지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통한다. 김재명 기자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백련산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연희베벌리힐스 아파트. 화려한 디자인에 높은 외벽 등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10일 이 아파트를 찾았을 때 주변 집들 가운데 단연 눈에 확 띄는 외관이었다. 지대가 워낙 높아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고개가 뻐근할 정도였다. 2개 동에 33가구만 살고 있지만 경비원은 일일이 출입자를 확인했고, 입구 곳곳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삼엄한 분위기였다. 이 아파트는 준공 당시 시가가 18억 원(전용면적 약 230m²·70평)에 달했고 최근에도 전세 거래가 8억 원대에 이뤄지고 있다.
2003년 P건설이 개발에 들어간 이 아파트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건축물 높이제한을 어겼다는 이유로 구청으로부터 수차례 공사중지와 시정명령을 받았다.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가 2006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12억 원 상당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된 ‘불법 건축물’이었다.
2006년 9월에야 이 아파트는 가까스로 준공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서대문구청 담당 공무원들의 위법행위가 있었고, 이들은 지난해 12월 23일 1심에서 줄줄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서부지법은 2006년 당시 도시관리국장이던 허모 씨(62·퇴직)에게 직무유기죄를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도시개발과장이던 이모 씨(61·퇴직)와 실무 담당직원이던 또 다른 이모 씨(50)에게는 직무유기죄를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고 10일 밝혔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P건설이 짓던 이 아파트는 2006년 당시 높이제한 위반 등으로 건축물 사용승인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자 P건설 측은 아예 개발행위준공검사를 새로 신청해 ‘계획고’(토지형질에 따라 조성된 지표면의 높이) 자체를 높이기로 했다. 이는 원래 허가내용을 바꾸는 것이어서 개발행위변경허가를 신청해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했고 담당 공무원들은 당연히 이 신청을 반려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 아파트 분양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던 현동훈 서대문구청장이 “개발행위 업무에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지시하자 허 전 국장 등은 P건설이 절차에 맞지 않는 준공검사 신청을 한 사실을 알고도 계획고를 변경해주고 준공검사를 내줬다.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는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허 전 국장은 담당 과장이던 이 씨에게 “구청장이 이사 갈 집이니 잘 챙겨보라”고 지시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들이 구청장이 입주할 예정이고, 상급자로부터 이 사건 아파트의 준공처리와 관련한 조속한 업무처리를 지속적으로 요구받자 자신의 직무를 방임 내지 포기했다”면서도 “소극적으로 위법한 직무집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임에도 결국 피고인들만 처벌받는 결과에 이르렀다”고 집행유예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현 청장은 기소되지 않았고, 지금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검찰은 2007년 9월 현 청장이 이 아파트 인허가 관련 편의를 봐준 정황을 포착한 감사원의 의뢰로 수사에 나섰지만 허 전 국장 등 하위 공무원들만 기소하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이 아파트 주민 등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아파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입주자 사이에서 ‘아랫사람들만 억울하게 됐다’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변호사 출신인 현 청장은 감사원 감사 당시 특혜분양 의혹에 대해 “분양을 받은 것은 맞지만 후배인 황모 씨에게 집을 팔고 전세로 살고 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현 청장에게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대문구청 공보팀 관계자는 “우리가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 사건을 기소했던 서울서부지검의 한 간부는 “전임자 때 일이라 잘 모르겠다”며 “구청장을 기소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 기소 당시 근무했던 간부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며 답변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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