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개헌의 명분과 방법론

  • 입력 2009년 7월 28일 02시 50분


지금부터 22년 전, 일컬어 제6공화국의 현행 헌법이 채택되었을 때 필자는 한 신문 칼럼에서 그것을 환영하면서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첫째는 대통령의 임기(5년)와 국회의원의 임기(4년)가 연동하지 않아 대선과 총선이 번번이 다른 시차를 두고 시행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 일정의 예측성을 파괴하고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것이었다. 둘째는 대통령의 5년 단임제 문제였다. 그것은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 등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행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으면서도 부통령제를 마련하지 않아 대통령 유고 시 정부의 연속성을 어렵게 한 것이다. 또한 부통령을 통한 정권의 지역적 균형 가능성을 어렵게 만든 점이었다.

돌이켜 보면 1987년의 현행 헌법 채택은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대통령 간접선거가 민주주의에 가까운 직접선거로 바뀐 획기적 전환이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그것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3인의 정파가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계산한 결과 나온 협상과 거래의 산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민 전체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것도 아니었고 충분하고 광범위한 숙고와 논의를 거친 것도 아니었다. 헌법을 포함한 국가의 법령은 아무리 잘된 것이라도 그것이 일단 채택된 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수정되는 것이 불가피할진대, 많은 문제점을 가졌던 1987년 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포괄적 개편 아닌 사안별 개헌을

문제는 헌법의 개정을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어느 정도, 또 어떠한 내용으로 하느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을 제정한 1948년 이래 1987년까지 40년간 9차에 걸쳐 주요 개헌을 경험하였다. 그 대다수가 4·19, 5·16, 12·12 등 정변을 동반한 것이었고 대통령책임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또는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왕래하는 대폭적인 체제 변화를 의미하는 개헌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개헌이라고 하면 포괄적인 권력 구조의 재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예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기한 소위 ‘원포인트’ 개헌안이었다. 그의 임기가 끝나기 얼마 전인 2007년 대통령 4년 연임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 발의 계획을 공언했던 것이다. 원포인트 개헌안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그것을 제의한 시점과 정치적 의도, 그리고 제안의 방법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결국은 불발탄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혁명 등 큰 정치적 변혁을 전제하지 않는 개헌은 포괄적인 것이라기보다 사안 특정적인 원포인트 개헌이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미국은 1788년 헌법을 채택한 이후 모두 27개의 개정안을 채택했는데 이는 여성의 투표권 부여, 연방수입세(income tax)의 신설, 대통령직의 2회 제한, 노예제도의 폐지, 투표권의 인종제한 폐지 등 모두 원포인트 개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성문 헌법의 본거지로 인정되는 미국에서 헌법 개정은 오랜 기간을 거쳐 부분적이고 점차적으로 또 개별 사안별로 이루어졌다. 미국과 같이 준법정신과 정당한 법의 절차(due process of law), 그리고 타협의 정치를 강조하는 나라에서 개헌은 절제 있게, 또 작은 규모로만 이루어졌다.

이에 대조적으로 오늘의 한국은 극심한 이념적 간극, 투쟁적 정치문화, 그리고 정치집단과 당파 간의 불신이 팽배해 있다. 입법 사안 하나를 가지고도 국회가 아수라장이 되고 정당 간의 투쟁이 격화되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취지가 좋다 해도 포괄적인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국론을 더욱 분열시키고 정치 에너지를 비생산적인 쪽으로 분산시킬 우려가 있다. 현행 헌법의 문제점 등으로 보아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명분은 있다. 그러나 시기와 방법론에 있어서 신중과 숙고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 신뢰받는 집단이 추진해야

그러면 현 시점에서 개헌과 개헌 논의는 어떻게 추진해야 할 것인가. 첫째, 개헌을 추진한다면 포괄적인 체제 개편이 아닌, 사안별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 서로 얽히고 상충될 가능성을 내포한 여러 사안을 한 번의 개헌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개헌은 무엇을 제의하느냐보다는 누가 왜 제의하느냐가 더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되도록 정부나 정당계파가 아닌 객관적이고 국민적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사와 집단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 속담에 “고장 나지 않은 것은 고치지 말라(If it ain't broke, don't fix it)”는 말이 있다. 우리의 현행 헌법이 100%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나 그런대로 우리의 민주화, 선진화, 세계화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 시점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능한가를 심사숙고하여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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