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10월 10일 13시 43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이란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철저히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검열 왕국으로 소문난 이란의 문화 정책이 이란 감독들의 영화 만들기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 나서기 때문이다.
| ▼관련기사▼ |
그래서인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부터 모흐센 마흐말바프까지 그 동안 우리가 보아온 이란 영화들은 참 착했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 <순환> 역시 착한 영화의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흔한 키스신조차 하나 없고, 주먹다툼을 벌이는 폭력신도 없다.
그러나 <순환>은 분명 이란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용기 있는 영화다. 빈곤과 억압, 숱한 사회적 편견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란 여성들의 삶이 '날 것'의 언어로 재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란 내에서 이 영화는 극장 개봉을 금지당했으며, 이란 여성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국제 영화제 진출까지 봉쇄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렵게 이국 땅에서 상영되는 <순환>은 그렇다고 혁명적인 대사를 읊조리는 영화는 아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네 명의 여성들이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가족과 사회에 유린당하는 모습이 포장되지 않은 영상으로 차분히 그려져 있을 뿐이다. 단 한 장면, 딸이 태어난 후 우울해하는 가족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순환>은 하고 싶은 말을 단출하게 끝낸다.
주제를 나열하는 순서로 보면 이 영화는 철저히 두괄식 어법을 택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한 아주머니가 산부인과 간호사와 승강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여진다. "초음파 검사 땐 분명 아들이라고 했는데...정말 딸이 맞나요?" 아주머니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딸을 출산한 이 가혹한(?) 현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 뒤부턴 왜 이 아주머니가 딸의 출산을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마냥 슬퍼했나에 대한 사례보고가 이어진다.
<순환>은 분명 몇 개의 단편을 이어 붙인 짜깁기 영화는 아니지만, 찬찬히 분석해보면 언뜻 옴니버스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계속 바뀌고 독립된 사건들이 모두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탈출한 여성은 모두 네 사람. 성차별이 없는 천국 같은 세상을 꿈꾸며 사랍행 버스 티켓을 끊는 18세 소녀부터 아이를 가졌지만 낙태를 할 수 없어 속앓이를 하는 20대 초반의 여성까지, 그들의 삶은 모두 출구 없는 터널처럼 암울하다.
그들은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회라는 더 큰 감옥에서 한 치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금된 몸이다. 자유를 잃고,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그들의 삶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악 순환의 고리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내세운 이 영화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원형의 궤도 안에서 이탈할 수 없는 이란 여성들의 삶을 '순환'이라는 빛나는 단어 하나로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쳇바퀴 같은 원 안에 갇혀있다. 나는 순환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모든 인간들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여성 문제만을 건드리는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